컨스터블과 터너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잎이 뭐예요? 손 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 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 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푸른 실로 짜 만든 내 천성의 깃발인지도 몰라.
아니면 그것은 하느님의 손수건이리라.
-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시집 [풀잎], <Song of Myself, 6>, 1855
휘트먼은 풀잎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천성을 상징하는 깃발, 혹은 신의 손수건이라고 노래한다. 이런 표현은 자연을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시계장치처럼 여기는 합리주의적인 세계관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낭만주의 안에서 풀잎은 쉽게 정의 내려질 수 없다. 그것은 자연의 한 조각이고, 인간의 마음과 닮은 한 편의 시(詩)이고 동시에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다.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분류되는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과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는 풀잎을 노래하는 휘트먼과 비슷한 감성으로 자연을 대한다. 그들이 보고 느낀 자연은 '화가의 마음이 반영된 풍경'이자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면서 '계속 변화하는 유기체였다. 두 화가는 동시대를 살았고 이처럼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자연을 매우 다르게 표현했다. 무엇이 동시대를 살았던 두 화가의 작품에 차이를 불러왔는지, 그 차이점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컨스터블은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20대 초반에 미술을 시작했다. 그는 회화에 대한 열정은 가득했으나 고전 회화의 방식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고전이 아니라 감을 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그는 그것을 직접 관찰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38살이 되도록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했으며, 당시 아카데미로부터는 그림이 거칠고 조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대의 예술 문법을 거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가 풍경화에 불어넣은 새로운 바람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건초마차>[그림 1]는 화가의 고향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얕은 물을 건너는 마차, 물가를 걷는 개, 농가와 나무, 변화하는 구름. 그림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가 직접 관찰하고 체험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하얀 점이 흩어져있는 것이 보인다. 당대 사람들은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컨스터블의 눈(雪)’이라고 불렀다. 또 나뭇잎 사이사이에는 붉은 점도 보인다. 이런 색 점은 자연에서 직접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화가가 자연에서 느꼈던 생동감을 보여주기 위해 추가된 것이었다. 그는 보이는 것을 담는 카메라가 아니라 느낀 것을 표현하는 화가였던 것이다.
컨스터블은 최초로 야외에 나가 유화를 그린 화가로 기록된다. 비록 마무리 작업은 화실에서 하였지만, 야외에서 빠른 붓질로 색을 기록하는 유화 스케치는 자연을 연구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림 2,3] 흥미로운 점은 전통적인 문법을 거부한 컨스터블이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하늘의 패턴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든 교본들을 꼼꼼히 베낀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화가의 회화 연구라기보다는 자연을 더 잘 관찰하기 위해 구름의 분류 기준을 익히는 과학자의 탐구에 가까웠다. 그렇게 과학자의 눈과 예술가의 감성을 겸비한 화가는 비로소 물감을 들고 야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사실 야외 작업은 튜브 물감이 발견되기 전까지 매우 불편한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컨스터블이 야외로 나아간 이유는 ‘무엇’을 그리는가 보다 ‘어떻게’ 그리는가가 그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쏜살같이 스쳐가는 무상한 시간 속에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 한순간을 회화로 붙잡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그것은 자연과의 교감이 필요한 일이었다. 시골 출신이었던 컨스터블에게 자연은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풍차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기상 변화를 읽는 법을 배웠던 그는 도시 출신 화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신호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수지 같은 데 쏟아지는 물소리, 버들가지, 오래된 썩은 판자들, 미끌거리는 기둥들, 벽돌 건물…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한다. … 나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감정을 말하는 또 하나의 언어인 것이다.” -컨스터블
컨스터블은 자연에 대한 진정한 애착을 보였다. 그에게 자연은 이데아를 숨기고 있는 대상도 아니었고, 위안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향도 아니었다. 그의 풍경은 오직 그가 사랑한 고향마을이었으며,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메신저였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터너는 전통을 무시한 컨스터블과 달리 고전적 풍경화에서 영감을 받았고 클로드 로랭과 같은 풍경화가가 되길 원했다. 클로드 로랭의 그림[그림 4]을 연상시키는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그림 5]는 옛 거장을 향한 그의 동경을 느끼게 해 준다. 터너의 이런 풍경화들은 아카데미와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았고 일찍부터 그를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점차 평론가들과 대중들과 멀어지는 그림을 내놓았다.
영웅의 앞길을 막는 광포한 눈보라, 포효하는 바다, 도시를 집어삼키는 화염[그림 6] 등 그의 회화 안에서 자연은 파괴적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인간의 배경으로 취급되었던 자연이 터너를 만나 비로소 세계를 뒤 흔드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들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주제가 아니라 한없이 자유로워진 표현이 문제였다. 자연의 격노 속에서 사물이 흐릿해진 그림들은 “환상적인 수수께끼”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 아닌 체험에 의거한 것이었다.
컨스터블과 달리 도시인이었던 터너는 자연에서 위안이 아닌 위협을 느꼈다. 그렇다고 자연이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터너에게 위대한 자연은 다가가고 싶은 신비였고 숭고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는 실제로 거대한 자연의 위력을 체험하기 위해 그 속으로 들어갔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컨스터블은 폭풍이 이는 겨울날에 선원들에게 돛대에 자기 몸을 묶으라고 하고는 네 시간 동안 성난 바다의 울음을 들었다고 한다. 실로 낭만주의자만이 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
터너의 무모한 체험은 그의 그림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림 7]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이 화가가 본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그가 표현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폭풍우의 분위기이자 그 속에서 느꼈던 자신의 감상이기 때문이다. 터너는 동료에게 그림을 제작하는데 정해진 과정은 없었으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표현될 대까지 물감을 열심히 칠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형태는 모두 빛나는 색채 속에 용해되었다. 따라서 이 그림 속에서 배와 파도를 분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배와 파도는 사라지고 색채와 빛만이 그림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를 대표하는 두 화가의 차이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고향의 자연 풍경을 사랑한 컨스터블은 자연을 과학적 탐구대상으로 여겼다. 그는 끈질긴 관찰과 연구로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다. 그의 풍경화를 본 다음에 하늘을 보는 사람들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면에 터너는 자연을 지각 불가능한 경외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의 자연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긴 하지만 그 실체를 드러내주진 않는다. 그런 자연 속에서 터너는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숭고함을 발견했다.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에게 느껴지는 신비한 숭고미는 그때까지 회화가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