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윤숙 Apr 08. 2022

조토, 성화에 인간의 감성을 불어넣다

르네상스의 서막

14~16세기에 르네상스Renaissance(부활, 재생)라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 사람들은 19세기 역사가들이었다. 그들은 14세기 후반에 시작된 크고 작은 문화 예술의 변화를 포착해 냈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의 특이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들은 16세기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중세와는 다른 매우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시대라고 느끼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달랐을까?


신과 종교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시대가 끝나고 인간 중심의 문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스·로마시대의 저작들과 자연이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종말론적 신비로부터 인간세계의 평범한 문제로 옮겨 갔다. 고딕양식 대신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고전 건축 양식이 부활하고 자연스런 인체 표현이 미술에 등장했다. 말그대로 부활과 재생의 시대였다.


이런 변화는 유럽 전반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시작은 이탈리아 피렌체[그림1]였다. 왜 이탈리아였을까? 그중에서도 왜 하필 피렌체였을까?   


그림1. 프란체스코 디 로렌조 로셀리 <피렌체 지도>, 1471-1482년 경 https://www.pinterest.co.kr




르네상스, 은행 자본가가 후원한 새로운 문화 예술 운동


12세기 말, 이탈리아의 사회적·경제적 조건들은 다른 유럽지역과 달랐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멸망 이후에 이민족 지배에 오랫동안 시달리면서 고대의 유산들이 파괴되고 국토가 유린 되는 경험을 했다. 한편 로마에 교황청이 있었기에 종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었고 동시에 교회의 부패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다. 이런 조건 속에서 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들에겐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줄 고대 로마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었고, 새롭게 고대 문헌들도 유입되고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봉건제와 기사제도가 덜 발달되어 있었다.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은 일찍부터 도시에 정착하여 금융귀족이 되었고, 적극적으로 상업과 금융업을 발달시켰다. 그에따라 도시가 커지고 시민계급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사회적·정치적으로 해방되어 교육을 받았고 도시의 주역이 되어갔다.


도시 국가들 간의 경쟁도 문예부흥을 도왔다. 봉건제가 발달하지 않은 이탈리아의 기본 단위는 도시국가였다. 거기엔 로마, 피렌체, 밀라노와 같은 거대 국가도 있었으나 시에나, 만토바, 라벤나와 같은 중소 도시들도 있었다. 이들 도시의 성격은 서로 달랐으나 각 도시의 주요 가문들은 경쟁적으로 문화를 육성하여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중 피렌체는 금융업이 가장 발달한 도시였고 예술에 투자할 자본이 넉넉하게 있었다.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이런 토양에서 성장했다.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생산을 담당하던 길드 조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세의 길드는 일감을 서로 배분하여 함께 생산해 왔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성당 건축과 같은 사업이 생기면 공모전을 통해 제작자를 구했다. 함께 일을 나눠하던 길드들은 이제 공모전을 두고 서로 경쟁했고 능력 있는 개인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천재적인 창조성을 지닌 예술가들은 예찬의 대상이 되어갔다.


찬사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최초의 미술사라고 할만한 『예술가 열전』을 써서 자기 시대 예술가들을 기렸다. 황제도 성인도 아닌 예술가들에 대한 평전이 등장했다는 것은 조각가와 화가들의 지위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교회의 요구대로 주문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새로운 형상을 만드는 창조적 예술가였다.        




위대한 개척자 치마부에와 회화를 부활시킨 조토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의 처음을 장식한 화가는 치마부에(Giovanni Cimabue, 1240~1302)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고딕의 전성기였고, 동방에서는 비잔틴 양식에 따라 성화를 그리고 있었다. 치마부에 역시 그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의 계약서에는 제단화를 그릴 때 어떤 규칙을 지켜야하는지, 황금을 얼마나 사용해야 하는지 등이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그래서 치마부에의 작품 <옥좌에 앉은 성모자>[그림 2]는 비잔틴 양식의 <블라디미르의 성모>[그림 3]와 많이 닮아있다. 성모자를 둘러싼 황금빛, 예수를 향해 기울어진 머리, 예수를 바라보라고 가리키는 손짓 등은 성화을 그리는 공식에 따라 그려졌다. 하지만 차이 역시 뚜렷하다. 치마부에의 성모자는 한층 자연스러워졌고, 천사들의 얼굴에는 인간적인 표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좌) 그림1. 치마부에, <옥좌에 앉은 성모자>, 1280년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우) <블라디미르의 성모>(비잔틴 양식) 약 1131년경


<채찍질 당하는 예수>[그림 4]는 치마부에가 가져온 발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의 동작은 더욱 사실적으로 변했고, 중세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배경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교회를 장식하는 성화에 인간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더한 혁신가였다.


그림 4. 치마부에(Cimabue), <채찍질 당하는 예수>, 13세기, 템페라화


사실 종교화의 역할만 두고 보자면 <블라디미르의 성모>는 나무랄 데가 없는 그림이다. 고귀한 금빛과 성스러운 성모자의 분위기는 세속을 떠나 종교적 명상에 잠기게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하지만 피렌체 사람들의 감성이 변해있었다. 그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보다 자연적인 형태를 왜곡하지 않은 사실적인 형태를 원했다. 이런 요구에 맞춰 회화를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치마부에의 제자였던 조토였다.


그림5.  조토, <옥좌 위의 성모자>, 1310년경, 판넬에 템페라,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이탈리아


조토의 <옥좌 위의 성모자>[그림 5]는 그가 자기 스승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으며 또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를 확인시켜준다. 그의 성모자는 가상의 옥좌가 아니라 실제 있을 법한 의자에 앉아있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도 예상 가능한 높이를 지닌 계단위에 올라 선 것처럼 서로 중첩되어있다. 정교함과 정감어린 느낌은 치마부에의 작품보다 덜하지만 견고한 형태와 옷주름 표현 등은 더 자연스러워졌다.


그림6.  조토,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5년경, 파도바의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


조토의 혁명성은 프레스코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리스도를 애도함>[그림 6]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성모와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세 내내 감추어졌던 인간적인 슬픔이 터져나오듯 지상의 인간들과 하늘의 천사들 모두 오열하고 있다. 이 그림의 놀라운 점은 등을 보이고 앉은 여인들이나 얼굴을 숙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울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피렌체 사람들에겐 놀라운 도약처럼 느껴졌다. 우리 눈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언덕 위의 나무조차도 이 그림을 사실적으로 만드는 놀라운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사라져 간 그림이 되살아나게" 만들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예술의 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창조적인 천재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