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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Jun 16. 2022

레오나르도 다 빈치, 깊고 어두운 거울

“오 불쌍한 인간들이여, 눈을 떠라.”

 

그림1. 주세페 보시, <레오나르도 초상>, 소묘, 토리노 왕립 도서관 https://en.wikipedia.org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깊고 어두운 거울

매혹적인 천사들이 신비 가득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들 나라를 에워싼

빙하와 송림 그늘 아래 나타난다.

-보를레르, 『악의 꽃』, <등대> 중


보들레르는 레오나르도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그림 1] 매우 신비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그의 천사들은 천상의 구름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차가운 그늘 아래서 나타난다. 그에겐 빛과 어둠, 이성과 모호함이 함께 공존한다. 레오나르도에겐 분명 이렇게 이중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는 거의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며 방대한 연구 기록을 남겼고, 수수께끼라고 여겨질 만큼 신비한 그림들을 그렸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는 언제나 완성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아있는 설계도는 실제 작동할 수 있는 기계를 위한 것이 아닌 상상이 산물이었으며, 이론은 불완전했다. 짧지 않은 활동 기간 동안 남긴 완성작은 10점이 조금 넘을 뿐이다. 그럼에도 레오나르도는 최선의 지성과 기술을 지닌 탁월한 인간형의 부활을 예고한 사람이었다.     

  


피렌체의 보테가에서 자란 소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근처의 조용한 시골 마을 빈치(Vinci)에서 아버지 세르 피에로(1426-1504)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을 수가 없었다.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맡고 있는 ‘고상한 직종’에 신분이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없게 많은 보호막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피에로는 아들을 피렌체 최고의 장인이었던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36-1488)[그림 2]의 공방에 보낸다. 당시 화가들은 부르주아들처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의식이 없었다. 그들은 말안장 제작자나 무두장이와 같은 ‘장이(artisan)’였다. 화가의 공방은 예술가의 작업실이 아니라 보테가(bottega-가게, 노점)였다. 하지만 15세기 초 베로키오의 공방에는 이전의 보테가와는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림2. 베로키오, <예수의 세례>.1475~1478년 (예수의 옷을 들고 있는 천사들을 레오나르도가 그렸고, 제자의 솜씨를 본 베로키오는 이후에 붓을 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베로키오는 당시 삼십 대 초반에 불과했지만 ‘혼자서도 일종의 기술 대학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청동 주물과 회화, 건축에서 인정받는 장인이자 기술 개혁가였다. 그의 공방은 최신 공법의 실험실이었으며, 정치 토론의 장이었고, 고대 철학을 비롯하여 음악과 문학을 즐기는 문화의 메카였다.


1467년 베로키오는 피렌체 대성당의 옥상 누각 위에 올릴 거대한 청동 구(球)를 제작한다. 그것은 약 2톤에 달하는 청동 주물을 떠서 107미터에 달하는 건물 꼭대기에 얹는 대단히 도전적인 작업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견습 초기부터 완벽한 기술자를 겸한 미술가의 본보기를 보면서 기술적 문제들과 친숙해질 수 있었다. 기술과 창조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머물면서 새로운 시대의 장인은 스스로 경험하고 탐구하여 새로운 것을 창안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최후의 만찬, 인물의 행동으로 마음을 그리다


레오나르도는 많은 분야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가 끝까지 계속 한 일을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화가는 붓을 통해 살아있는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화가로서 그가 이루려는 목표는 매우 높았다. 소용돌이치는 물, 피어나는 꽃, 아름다운 피부, 부드러운 대기의 공기 등 모든 현상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오직 인물만을 그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시에 인물을 그릴 때에는 인물의 마음속 목적까지 드러날 수 있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3.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4~1498, 460×880cm,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교회, 밀라노https://www.wga.hu

<최후의 만찬>[그림 3]은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실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림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말은 번개처럼 제자들에게 내리쳤다. 사도들은 공포에 놀라 움츠리기도 하고,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예수에게 질문하기 위해 달려가기도 한다. 온갖 감정의 폭풍 속에서 예수만이 고요하고 위대한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인물들의 동작이 이렇게 다양한 데도 그림은 전혀 산만하지 않다. 열두 제자들은 세 사람씩 무리를 이루며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 빈치는 예수의 얼굴을 밝은 창문 한가운데 있는 소실점에 놓아서 누가 주인공인지를 분명히 했다. 이렇게 강렬하고도 조화로운 화면은 같은 주제를 다룬 이전의 그림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그림4.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 1480년, 400×880cm, 산 마르코 수도원 식당, 피렌체https://en.wikipedia.org


기를란다요의 작품[그림 4]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매우 경건한 만찬 장면을 보여준다. 관습적으로 배신자 유다는 홀로 떨어져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고, 요한은 예수의 품에 안겨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두 가지 규칙을 모두 깨버렸다.

그림5. <최후의 만찬> 세부 – 유다, 베드로, 요한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유다는 요한에게 급히 달려온 베드로에 의해 밀쳐져서 그늘 속에서 식탁에 몸을 기대고 있다.[그림 5] 그는 함께 있으면서도 고립된 것처럼 보인다. 그만이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고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한 테이블에 앉은 배신자를 구분해 냈다.


또 레오나르도는 시각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꽤 용기 있는 시도를 했다. 만찬이 벌어지는 식탁을 매우 작게 만든 것이다. 제자들은 도저히 함께 앉을 수 없는 작은 식탁에 모여 있다. 그들에게 만찬을 즐길만한 자리를 내어준다면 기를란다요의 그림처럼 인물의 크기는 작아지고, 사도들의 행동이 만들어 내는 강렬한 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다 빈치의 혁신은 깊은 사색의 결과였다. 바사리는 다 빈치가 이 작품을 그릴 때 붓도 들지 않은 채 벽 앞에 서 있는 날이 많았다고 전한다. 드물고도 고귀한 영감은 천재의 순간적인 기지가 아니라 오랜 탐구의 결과였다.       



모나리자, 신비로운 미소와 대기(大氣)를 담다


<모나 리자>[그림 6]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이 그림은 무수한 풍문을 달고 있다. 바사리는 이 그림을 모나 리자라고 명시했지만 많은 미술 사학자들은 그 말에 의구심을 품고 진짜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그중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추정되는 인물만 해도 무려 열 명가량이나 된다. 그중 가장 놀라운 의견은 이것이 수염과 주름을 제거한 화가 자신의 자화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진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이 작품을 <모나리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 초상화와 매우 잘 어울린다. <모나 리자>의 가장 큰 특징이 모호한 미소이기 때문이다.

그리6.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1506년, 유화, 77×4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https://en.wikipedia.org/wiki/Mona_Lis


다 빈치는 윤곽을 희미하게 나타내는 ‘스푸마토 기법’을 이 작품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모나 리자의 입 가장자리와 눈 끝을 흐릿하게 표현하였다. 그것은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미소였다. 이 때문에 모나리자의 표정은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 사람들은 때로는 그녀의 미소에서 기쁨과 만족을 보고, 때로는 위로와 슬픔을 보았다.


이 그림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모나리자의 어깨너머로 아스라이 멀어지는 풍경이다. 다 빈치는 알베르티의 원근법이 가진 효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최후의 만찬>을 통해 자신의 지식을 한껏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수학적으로 계산된 공간만으로 자신이 자연에서 본 것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연은 언제나 풀리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그를 자극했다. 귀족과 같이 멋지게 차려입은 레오나르도를 흙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시장 바닥을 헤매게 하는 것은 이름 모를 잡초와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물, 꿈틀거리는 도마뱀과 기괴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직접 자연을 마주했기 때문인가, 그는 사물과 인간의 눈 사이에 있는 공간이 주는 효과를 감지해냈다. 사물이 멀어지면 흐릿하게 보인다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실은 다 빈치에 의해 처음으로 회화에 도입되었다. 미술에선 이를 ‘공기 원근법’이라고 부른다.


다 빈치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신비였다. 모든 현상이 그를 사로잡았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빈치는 이렇게 말한다.


“나무, 식물, 꽃, 다양한 동물들 …… 훌륭한 화가라 불릴만한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각각 동등한 중요성과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오 불쌍한 인간들이여, 눈을 떠라.”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노트북스, 번역 이완기 외, 루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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