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에 이를 수 없었던 고귀하고 고독한 영혼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그림 1]를 그릴 때였다. 그가 예정 시일 안에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자 교황은 그를 재촉하며 많은 불평을 했다. 참을성 없는 교황이 언제쯤 그 일이 완성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만족할 때입니다.”
짧은 일화가 말해주듯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oti, 1475~1564)는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였다. 그는 모든 조각가가 포기한 거대한 돌덩이로 <다비드>[그림 2]를 조각하면서 피렌체의 슈퍼스타가 되었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천지창조>를 완성함으로써 예술가들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수없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며 구십 평생을 꽉 채운 미켈란젤로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야 조각의 기본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죽어야 하다니…”
이처럼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으면서도 만족에 이를 수 없었던 고귀하고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가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메디치 가문의 정원이 품은 천재
미켈란젤로는 가난한 귀족 집안의 맏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문법학교에 보내 번듯한 직업을 갖길 원했으나 미켈란젤로의 관심은 예술을 향해 있었다. 예전보다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예술가는 여전히 공사장이나 작업실처럼 먼지 쌓인 공간을 전전하는 낮은 직종이었다. 하지만 결국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꺾고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 [그림 3]의 제자로 들어가 3년간의 수련생활을 한다. 짧은 도제 생활을 마치고 미켈란젤로는 스승의 추천으로 메디치 가문의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된다.
공화국 피렌체의 실질적인 왕이었던 로렌초 데 메디치는 아카데미를 열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연구시키고 도시의 영광을 드러낼 예술가를 키우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단숨에 로렌초의 눈에 들어 메디치 가문 사람들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그 자녀와 같이 교육을 받았다.
그가 받은 혜택 중 가장 특별한 것은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이 가득 한 메디치 가문의 정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이었다. 그는 미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고대 유물들이 가득한 정원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조각을 연구했다. 메디치의 정원이 미켈란젤로의 학교였고, 고대의 조각들이 그의 스승이자 도반이었다.
<피에타>, 신의 어머니는 울지 않는다
최고 권력자의 안뜰에서 키워진 젊은 조각가는 26살에 <피에타>[그림 4]를 조각해 스타덤에 오른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몸은 아래를 향해 축 늘어져 있는데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무게에 눌리지도 않고 슬픔으로 표정이 일그러지지도 않은 채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33살에 죽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고 어떤 이가 성모가 너무 젊다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신의 어머니는 지상의 어머니처럼 울지 않는다”라고 응수했다. 그는 애초부터 성모의 나이는 물론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표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적 감정이 아니라 초월적 아름다움, 세속의 경험 아니라 초월적 고귀함이 그의 지향점이었고 <피에타>는 그 목표에 부합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이들이 <피에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그것을 엉뚱한 조각가의 작품이리고 말하는 것을 미켈란젤로가 듣게 되었다. 그는 바로 끌과 정을 들고 가서 성모가 가슴에 두른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이 것이었다. 중세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가들은 기술자였으며, 교회에 그려진 대형 벽화들은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공방 장인과 직인들의 합작품이었다. 그런데 자존심 강한 청년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조각을 자신의 창조물로 여겼다.
그리스 로마의 철학을 배우고 고대의 유물이 가득한 정원에서 조각을 연구하던 소년에게 조각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위대한 정신을 보여주는 예술이었다. 이런 생각이 그의 자의식과 자존심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켈란젤로가 오직 그만이 해낼 수 있는 거대한 작품들을 완성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천지창조>, 르네상스의 거인이 만들어낸 새로운 종족
미켈란젤로는 제자를 두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는 구상부터 제작까지 거의 전 과정을 혼자서 해내며 천재 작가의 면모를 과시했고 자주 신랄한 말을 내뱉었다. 이런 성격은 다른 화가들의 질투를 불러왔다.
미켈란젤로를 시기하는 브라만테는 교황을 부추겨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것은 사실 억지스러운 요구였다. 그때까지 미켈란젤로는 이렇다 할 회화 작품을 남긴 적이 없었고, 시스티나 성당의 양 벽면엔 이미 ‘모세의 일생’과 ‘예수의 일생’을 주제로 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각각은 기를란다요(미켈란젤로의 스승), 보티첼리,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 라파엘로의 스승) 등 당대의 최고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공방 직인들과 함께 그린 그림들이었다. 다양한 작품들은 여러 화가의 손을 거쳤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림 3,5]
천장화를 의뢰한 교황과 브라만테의 기획은 삼각형의 아치 부분에 사도들의 그림을 채우고 넓은 평면은 장식적인 무늬만을 넣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조각만 해온 미켈란젤로에게는 힘든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맘대로 그릴 권한을 요구한 뒤 보다 거대한 작업에 돌입한다. 그리고 4년 만에 혼자서 <천지창조>를 완성했다.
이 위대한 조각가는 변화하고 흔들리는 불완전한 자연의 요소들을 걷어내고, 인간의 지각이 지닌 한계를 무시하고, 확고한 형태만을 남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보여준 풍부한 자연의 모습은 미켈란젤로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천지창조>에는 오직 인간뿐이다. 레오나르도가 세계를 관찰하고 어떻게 인간의 시선으로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에 천착했다면 미켈란젤로는 그 세계에 위대한 인간의 형상을 세우고자 했다.
미켈란젤로의 인간 형상은 여자든 남자든, 성인이든 악마든 언제나 강건한 신체와 강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느슨함과 부드러움은 미켈란젤로의 덕목이 아니다. 긴밀한 배치, 행동의 절제, 명료함이 그가 추구하는 형상이었다. 구부러진 관절, 뒤틀린 인체에서는 숨어있는 힘이 느껴진다. 심지어 아직 생명력을 얻지 못해 축 늘어져 있는 아담조차 엄청난 힘을 갖게 될 근육들을 지니고 있다. [그림 6]
회화에서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를 ‘읽는’ 재미는 사라졌다. 대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누구도 보지 못했던 포즈들이 등장했다. 그의 그림은 인물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묻지도 못하게 관객을 압도해 버린다. 관객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품 그 자체, 웅장한 형상 그 자체가 내뿜는 기운을 느낀다. 그것은 분명 관람객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인간들로 가득한 <천지창조>는 벽면에 그려진 다른 작품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조화와 균형의 시대인 르네상스에 부조화를 들어오게 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시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르네상스의 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