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완성
가난과 고독, 우울과 불화, 독창적인 천재성과 부족한 사회성.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는 대개 이러하다. 그런데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는 이 모든 선입견과 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화가들과 조각가는 물론 귀족과 교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성격 좋은 예술가였다. 바사리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라파엘로는 과거의 예술가들과는 달리 인간 정신의 갖가지 미덕, 즉 우아·근면·아름다움·겸손을 그리고 모든 부도덕과 결점을 상쇄할만한 착한 품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의 모든 것을 체득했고, 피렌체에 와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라는 천재들의 양식을 흡수했다. 그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교황의 요구도 다 들어주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다양한 것을 받아들였는데 라파엘로의 그림이 전혀 산만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우아하고 조화롭다.
라파엘로는 당시에 예술을 주도하는 피렌체와는 좀 떨어진 우르비노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으나 지적인 인물로 어린 아들을 그 지역의 최고 화가였던 페루지노에게 보냈다.
라파엘로가 스무 살 무렵에 그린 <마리아의 결혼>[그림1]은 같은 제목을 가진 페루지노의 작품[그림 2]과 전체적인 구성이 비슷하다. 간결하고 우아한 선들, 감성이 풍부한 얼굴, 고요하고 순수한 분위기 등 페루지노의 독보적인 표현법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멀리 보이는 건축물과 깊이감이 잘 표현된 공간은 스승과 제자가 고전 건축은 물론 원근법에도 통달했음을 보여준다.
페루지노는 결혼반지를 끼워주는 이 소박한 장면을 재치 있게 연출했다. 요셉과 더불어 몇몇 구혼자들은 나뭇가지를 들고 마리아에게 청혼을 했고, 마리아는 요셉을 선택했다. 화가는 요셉의 나뭇가지에만 꽃과 나뭇잎을 그려 넣어 그가 마리아의 특별한 배필임을 보여주었다. 반면 선택받지 못한 청년들은 실망감에 나뭇가지를 꺾고 있다. 라파엘로는 소소하지만 재밌는 이런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런 변화로 고요한 화면에 생기고 잔잔한 활력이 더해졌다.
이 밖에도 라파엘로는 스승의 장점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몇몇 변화를 주어 좀더 흥미로운 화면을 만들어냈다. 우선 그는 후방에 보이는 건축물의 크기와 모양을 변화시켰다. 좀 더 작아지고 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그려진 건축물은 더욱 이상적인 형태가 되었고, 넓은 하늘을 열어주어 보다 여유로운 배경이 생겨났다.
라파엘로는 성모와 요셉의 위치를 바꾸고, 주례를 보는 사제의 상체를 약간 옆으로 기울여 그렸다. 사제의 고개가 기울어지면서 사제와 마리아의 머리 사이에 공간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마리아의 얼굴이 더 돋보이게 되었다. 한편 마리아가 왼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오른팔이 전면에 오게 되어 반지를 기다리는 손에 더욱 시선이 모아진다. 또한 그림의 주제를 상기시키는 성모의 결혼반지가 화면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이렇게 작은 변화들로 스승을 뛰어넘는 그림을 완성했다.
스승에게 독립한 라파엘로는 예술의 메카인 피렌체로 향했다. 그런데 그 무렵 메디치 가문은 몰락했고 피렌체는 더 이상 예술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반면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로마에서 대규모 공사를 벌이며 예술가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우르비노에서 갓 상경한 라파엘로를 로마로 이끌어준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의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였다. 그는 건축적 재능만큼이나 정치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성당을 새로 짓는 대사업을 주도하며 작업에 참여할 예술가들을 직접 불러 교황에게 소개했는데 그중에 라파엘로도 끼어있었던 것이다.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가 소개한 스물다섯의 젊은 화가에게 교황 집무실로 쓰이게 될 <서명의 방> 벽화를 맡긴다. 교황은 당대의 최고 철학자들과 의논하여 그릴 벽화의 주제도 정해주었다. 법학, 철학, 신학, 시학(예술). 이렇게 네 가지 주제로 반원형의 네 벽면의 채우는 것이 라파엘로의 첫 과제였다. 이 방의 그림들은 모두 훌륭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철학을 주제로 한 <아테네 학당>[그림3]이다.
[그림3]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1, 프레스코, 500×770cm, 서명의 방, 사도궁전, 바티칸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는 몇 개 안 되는 계단으로 공간을 분리시켜 화면을 안정적으로 나누었다. 계단 위에선 플라톤(중앙에 붉은 망토를 두른 인물), 아리스토텔레스(푸른 망토를 두른 인물)를 비롯한 인문 철학자들이 토론을 하고, 계단 아래에 피타고라스(왼쪽 하단에 큰 책에 메모를 하는 인물), 유클리드(오른쪽 하단, 컴퍼스를 들고 석판에 도형을 그리는 인물)와 같은 수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개처럼 거리에서 살았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관람자의 시선을 중앙으로 향하게 한다. 라파엘로는 건축물 가운데 뚫린 아치를 만들어 중심에 선 인물들이 돋보이는 밝은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표현법은 분명 스승 페루지노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배운 것이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서명의 방에 있는 <파르나소스>[그림4]는 아폴론과 뮤즈가 사는 시인들의 낙원을 주제로 한다. 라파엘로는 벽면에 있는 창문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파르나소스 언덕을 만들고 호메로스(파란 옷을 입은 눈먼 노인)와 단테(호메로스 뒤에 붉은 옷을 입고 옆으로 선 남자)를 비롯한 시인들을 그려 넣었다.
그중 사포sappho는 유일하게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비틀린 자세와 웅장한 근육 등은 라파엘로의 이전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것은 분명 미켈란젤로의 인물을 본 딴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만큼 다양한 자세의 인체를 그리는데 능숙한 화가가 아니었다. 사포의 자세는 어딘가 어색하고 창문에 기댄 팔도 허공에서 중심을 잃을 것 같다.
다행히 라파엘로는 르네상스의 거인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장점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율리우스 2세>[그림5]에서 라파엘로는 초록색 커튼으로 배경을 단순화시키면서 교황의 붉은 옷과 뚜렷하게 대비시켰다. 이처럼 단순하고 명료한 구성은 관람자가 교황의 얼굴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교황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겨있다. 흰 손에 끼워진 화려한 반지들은 교황의 지위를 뚜렷하게 보여주지만 움푹 들어간 눈은 그늘 속에 잠겨있다. 반듯하고 단단해 보이는 이마와 코는 고집스러운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멍하게 앞을 보고 있는 교황은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서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업무 중에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에 비유하자면 연출된 증명사진이 아닌 우연히 찍은 스냅사진과 같은 연출법이다. 라파엘로는 이렇게 교황의 실제 모습을 포착하여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다.
놀랄 만큼 사실적인 인물을 그릴 수 있었던 라파엘로는 세상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이상적인 인물도 만들어냈다. <시스티나의 성모>[그림6]는 가볍고 편안하게 구름 위를 걷는 천상의 여인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ii, 1821~1881)는 이 그림을 보고 성모의 신성한 얼굴에 깃든 아름다움, 순결함, 슬픔과 두 눈 속의 겸허와 고뇌를 찬미했다.
이 그림의 아기 예수도 성모와 더불어 평범한 인간의 아기가 아니다. 예언자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아기 예수는 안겨 있다기 보다는 팔에 기대어 앉아있다. 그는 영웅적인 자세로 신처럼 앉아서 확고한 눈길로 관람자를 응시한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처럼 혁명적인 혁신을 가져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회화가 갖고 있었던 장점들을 강화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서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을 완성해냈다. 완전하게 균형 잡힌 화면, 군더더기 없는 표현들, 우아한 선과 기품 있는 인물들은 고귀하고도 아주 드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