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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Aug 22. 2022

벨리니와 조르조네, 읽는 그림이 아닌 느끼는 그림

색채주의의 탄생을 예고한 베네치아 르네상스

베네치아는 반짝이는 도시다. 잔잔한 바다가 태양 빛을 반사하고 비잔틴 성당의 모자이크가 황금색으로 빛난다. 동시에 베네치아는 희뿌연 도시다. 물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침저녁으로 물안개가 피어올라 시야를 흐리게 한다. 그곳에도 르네상스는 찾아왔고 예술이 발달했다. 피렌체 회화와 북유럽 회화가 모두 베네치아 화가들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 항구도시의 화가들은 피렌체로부터 원근법을 배웠다. 하지만 이들은 피렌체의 화가들과는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와 로마의 화가들은 서사적인 주제를 조각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겼다. 분명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인물들은 회화로 표현된 조각이었다. 반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색채와 질감, 분위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축축한 대기에 스민 햇살, 어슴푸레 드러나는 풍경이 이들의 주제였다. 북유럽에서 전수된 유화는 이것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재료였다.




조반니 벨리니, 색채를 회화의 주인공으로 세우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는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회화의 기초를 익혔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하자 아들과 함께 캔버스에 유화로 그림을 그렸다. 북유럽에서 전수된 유화는 베네치아에 딱 맞는 재료였다. 벽에 직접 그리는 프레스코화나 나무에 그리는 템페라화는 습기로 인해 훼손되기 쉬웠다. 유화는 캔버스 천에도 그릴 수 있었다. 캔버스에 그리는 유화는 내구성이 좋았고 옮기기도 쉬웠다. 또 캔버스는 원하는 크기와 모양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게다가 유화는 천천히 마르기 때문에 부드러운 색조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유리했다. 유화를 익힌 화가들은 반짝이는 광택은 물론 다양한 깊이의 어둠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1] 조반니 벨리니, <성모와 성인들>, 1505년. 제단화, 목판에 유채, 캔버스에 모사, 베네치아 산 차카리아 성당


<성자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그림1]는 다양한 기교를 익힌 이 특별한 화가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화가는 원근법을 잘 적용하여 고전적인 형태의 건축물을 그리고 인물들이 가상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머물게 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는 옥좌 위에 앉아있고 그 밑에선 천사가 악기를 연주한다. 화가는 성모의 머리를 왼쪽으로 하고 천사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한편 그림 왼쪽엔 베드로와 성녀 카타리나가 서 있고 오른쪽엔 성녀 루시아와 히에로니무스가 서있다. 벨리니는 두 성인을 정면으로 그리고, 두 성녀들을 측면으로 그려서 대칭을 이루게 하여 그림에 안정감을 주었다.


인물들은 모두 성스럽고 고요하게 그려졌다. 이들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것은 왼쪽에서 들어오는 빛이다. 화가는 기둥 옆에 야외 외부 풍경을 그려 넣으며 그곳으로부터 자연광이 흘러드는 것처럼 묘사했다. 빛은 실내의 공기를 바꾸어 황금빛 모자이크를 은은하게 빛나게 하고, 인물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면서 윤곽을 부드럽게 만든다. 그와 동시에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서 고개를 숙인 베드로와 히에로니무스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흐릿함이 성인들의 사색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느끼게 한다.


이렇게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파랑과 빨강이 풍요롭게 반복되면서 조화를 이룬다. 히에로니무스의 붉은 옷은 그림자에 잠긴 그의 얼굴보다 시선을 끌고 성모의 푸른 옷자락은 화면 가운데서 빛난다.




조르조네, 그 무엇도 아닌 풍경화


조르조네 바바렐리Giorgio Barbarelii, 1478? ∼ 1510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화가이다. 바사리는 그가 베네치아에서 사랑받았던 화가 벨리니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던 화가였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짧았고 남아있는 자료는 불분명하다. 그의 작품이라고 간주되는 작품이 20점 정도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시되는 것은 그중 약 6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의 독창성과 상상력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림2] 조르조네, <폭풍우>, 1508년경, 캔버스에 유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폭풍우>[그림2]는 조르조네의 작품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화가의 일생만큼이나 베일에 싸여있다. 연구자들은 아직까지도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과 나뭇가지에 기대선 남자가 누구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라고도하고, 당시의 베네치아를 둘러싼 분쟁과 관련된 알레고리라고도 한다. 두 번째 해석을 따르면 여인은 너그러움, 중간에 서있는 기둥은 불굴의 의지, 군인과 같은 남자는 용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번개는 알 수 없는 운명의 대응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정설은 아니다.


당시 사람들도 이 그림의 제목을 알지 못했다. 1530년 작품 목록엔 다만 ‘돌풍과 집시, 그리고 군인이 있는… 풍경화’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 그림의 진정한 가치를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이 그림은 ‘풍경화’다! 즉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읽는 그림’이 아니라 분위기를 ‘느끼는 그림’이다. 구름 사이로 번쩍이는 번개와 폭풍우가 곧 몰아칠 것 같은 대기가 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다.


언제 폭풍우가 몰아칠지 모르는 강변에서 남자는 여인을 바라보고 여인은 관람자를 본다. 도시는 번개의 섬광 아래서 빛나고 폭풍우는 아직 두 인물과 관람자 사이에 오가는 말 없는 대화를 깨뜨리지 않았다. 조르조네는 벨리니가 건물 사이로 살짝 보여준 풍경과 자연광선이 만드는 신비한 분위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인물과 풍경을 하나로 통합시켰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새로운 조화를 빚어냈다.


[그림3] 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 1510년경, 캔버스에 유채


조르조네는 30대 초반에 흑사병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로 인해 <비너스>[그림3]는 미완성작으로 남을 뻔했다. 다행히 작품은 조르조네와 교류했던 베네치아의 거장 티치아노의 손을 빌려 완성되었다. 비너스는 너른 풍경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다. 현대 과학은 X-레이를 통해 비너스의 발치에 작은 큐피드가 있었다는 걸 밝혀냈다. 만약 화가가 큐피드를 남겨두었다면 이 그림의 의미는 더욱 분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르조네는 의미 대신 풀밭 위에 홀로 누운 여인의 누드가 만들어내는 관능적인 분위기를 선택했다. 그 덕분에 이 그림은 이후에 등장하는 수많은 누드화의 모태가 되었다.


피렌체의 화가들은 이처럼 중간에 그림의 구성이 바뀌는 베네치아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양한 스케치를 통해 그림의 구성을 마친 뒤에 작업을 시작했다. 빛과 그림자로 인해 윤곽이 불분명해지는 것도 피렌체의 정서와 맞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 화가들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데생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탈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베네치아 회화는 어설픈 데생 실력을 색채로 메꾸는 부족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미술사는 베네치아 화가들을 색채주의의 탄생을 예고한 혁명적인 사람들로 기억한다. 그들은 회화의 조연이었던 색채를 당당한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회화는 더욱 매혹적인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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