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도구가 된 베네치아의 문화 영웅
“회화의 군주”, 티치아노 베첼리노Tiziano Vecellio, 1488?~1576의 별명이다. 그는 베네치아 정부의 공식 화가였으며, 유명 인사들이 앞 다투어 초상화를 의뢰하는 실력자였다. 황제는 그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고, 교황은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티치아노가 떨어뜨린 붓을 카를 5세가 직접 주어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티치아노가 죽었을 때 베네치아 화가들은 피렌체 화가들이 미켈란젤로에게 바쳤던 예우를 따라 화려한 장례식을 하길 원했고, 베네치아 정부는 페스트가 창궐하는 상황임에도 예외적으로 이를 허가했다. 그는 그야말로 비네치아의 문화 영웅이었다.
이렇게 영광스런 화가의 그림은 매우 다양하다. 신비에 싸인 성모와 관능적인 여성의 누드, 고결한 승리자인 황제와 술 취한 사티로스Satyr, 고요한 전원 풍경과 불타오를 것 같은 하늘까지. 그의 붓은 모든 것을 창조해냈다.
작은 산악도시에서 태어난 티치아노는 9살 무렵 화가가 되기 위해 베네치아로 왔다. 약 13년의 수련기간 동안 그는 4명의 스승과 함께 했는데 그중엔 베네치아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던 화가 조반니 벨리니도 있었다. 그는 스승의 기법과 더불어 당시 베네치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조르조네의 표현법까지 익히며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그래서 티치아노의 초기 그림들은 조르조네의 분위기가 깊이 배어있었고, 몇몇 작품은 최근까지도 누구의 작품인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그림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티치아노는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1510년 조르조네가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페스트로 죽고 1516년 벨리니마저 사망하자 티치아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베네치아에서 독보적인 화가가 되었다. <성모 승천>[그림2]은 이 젊은 화가가 그런 명성을 얻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가에게 주어진 과제는 고딕 성당 내부에 세워질 제단화였다. 뾰족한 아치형의 고딕 창문으로 찬란한 광채가 쏟아지는 실내에 설치될 그림은 공간의 크기에 걸맞게 거대하고 웅장해야 했다.[그림3] 티치아노는 높이가 6미터가 넘는 화판을 공간과 어울리는 둥근 아치형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그 안을 놀라운 방식으로 채워나갔다.
황금빛 광채로 뒤덮인 천상에선 천사와 하느님이 날고 있고, 지상의 인물들은 놀라움과 감동에 휩싸여 있다. 그 가운데 성모는 감격에 찬 몸짓으로 우아하게 하늘로 오르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아기 천사들은 춤을 추듯 경쾌하게 움직인다. 정지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인물들이 움직인다.
티치아노는 높이가 거대한 화폭을 셋으로 나누면서도 인물들의 팔 동작을 통해 상승하는 느낌을 연결하여 통일감을 주었다. 그는 색채를 통해서도 조화를 만들어냈다. 성모를 우러르는 사람들 중 두 사람의 붉은 옷이 성모의 붉은 옷과 거대한 삼각형을 그리며 전율하는 화면에 균형을 맞춰 준다. 형태와 색채, 율동감과 조화. 티치아노는 등단했을 때부터 완성형 화가였고 그의 그림엔 부족함이 없었다.
1530년 완숙기에 이른 화가는 카를 5세를 만난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 중부 유럽이 그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다양한 초상화를 주문했고, 티치아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위대한 작품으로 화답했다.
<뮐베르크의 카를 5세>[그림4]는 황제를 창을 들고 말 위에 앉아있는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로마 황제를 연상시키는 기마상은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표현하기에 좋은 방법이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이자 기사도적 덕목을 갖춘 기사로서 강한 승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을 그릴 때도 색채로 화려함을 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황금색은 갑옷을 빛내고, 붉은 색은 곳곳에서 화사함을 만들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맞춘다. 어스름한 하늘 아래 평온한 풍경이 펼쳐지고 황제를 태운 말이 경쾌하게 앞발을 내딛는데, 말 머리가 향하고 있는 곳이 가장 밝게 빛난다. 풍경도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그림에 생명을 더하고 신의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장중하고 위엄 있는 초상화였다. 그리고 동시에 황제를 미화시키며 비위를 맞추는 그림이었다. 티치아노는 주문자의 요구를 그림에 전폭적으로 반영했으며, 그림을 완성한 후에도 주문자가 원할 경우 그림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굽힐 줄 모르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을 미술가의 전형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런 화가의 자세는 비굴해 보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티치아노는 제자들의 작품에 약간의 터치를 얹어 자신의 그림으로 팔았고, 말년에는 그림 값을 높게 받기 위해 거래량을 줄였다. 그리고 자신의 연금이 아들에게 남겨질 수 있도록 관리도 철저히 했다.
이런 기록들은 티치아노가 순수한 예술의 화신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말년 작품들은 황제의 아첨꾼이자 세속적인 인물이었던 이 화가가 회화의 일인자이자 새로운 화풍의 창시한 위대한 예술가였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티치아노는 90세에 작고하기 전까지 붓을 들었다. <자화상>[그림5]은 노년에 이른 티치아노의 모습을 보여준다. 평범한 모자를 쓴 화가는 자신의 재력과 지위를 자랑하듯 화려한 목걸이와 모피코트를 입고 있다. 이 네 줄의 목걸이는 귀족 작위와 함께 황제에 받은 것으로 그의 자부심의 상징처럼 빛난다. 헌데 그의 자세는 평온하지 않다. 여느 화가의 자화상처럼 정면을 응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어딘가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에 놀란 듯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과 화가를 놀라게 한 소리가 그가 있는 실내가 열린 공간임을 암시한다. 화가는 노인이 되었지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곧 벌떡 일어날 것만 같다.
<피에타>[그림6]는 티치아노가 죽던 해에 자신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늙은 성 제롬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죽은 예수의 몸을 어루만진다. 티치아노는 이 겸손한 성인의 얼굴의 자신을 얼굴을 그려 넣었다. 충동적으로 한 손을 들고 한 발을 내딛는 막달라 마리아와 횃불을 들고 날아오르는 아기 천사가 화면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지만 전체적인 색조는 음울하다.
말년에 이른 화가는 수십 년간 그려온 자기 스타일에 변화를 꾀했다. 화려했던 색감은 빛을 바래고 어딘가 슬프고 음산한 기운이 화면을 채운다. 티치아노는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르네상스 회화의 종말을 예감한 것 같다. 르네상스 회화에 안정과 평온을 불어 넣어 주었던 좌우 대칭과 삼각형 구도는 깨어졌다. 붓질도 마감을 덜한 것처럼 거칠다. 그림 가까이 다가가면 형체는 깨어지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감 덩어리들이 보인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명확한 형상이 보이고 흰 물감 덩어리들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말년의 티치아노는 그림을 시작할 때 마음속에 완벽한 완성형을 두지 않았다. 그는 기반이 되는 색으로 대강의 구도를 잡고 밑그림을 그렸다. 그 후 밝고 어두운 부분을 나누어 칠하며 형상을 만든다.
특이한 점은 그 다음 과정이다. 티치아노는 기초를 다져 놓은 그림을 뒤집어 둔 채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는 몇 달이 지난 뒤에 다시 그림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수정하며 완성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부족함이 없을 때까지 생생한 살을 입힌 뒤 그는 다시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거친 붓질로 강한 검은 색을 얹어 어둠을 더하거나 피처럼 붉은 색을 얹어 쾌활함을 더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런 제작 방법은 그림을 영원히 제작 과정에 머물게 했다. 화가가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의 그림은 계속해서 수정과 변형을 거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티치아노는 그렇게 색채와 형상이 이끄는 대로 그림을 수정해 나갔고, 자기 자신조차 회화의 도구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