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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혜탁 칼럼니스트 Jun 01. 2019

<파리의 딜릴리>, 색채의 마법 속 묵직한 메시지

- 미셸 오슬로, <파리의 딜릴리(Dilili in Paris)>

[석혜탁의 Movie無患] <파리의 딜릴리>, 색채의 마법 속 묵직한 메시지

- 미셸 오슬로, <파리의 딜릴리(Dilili in Paris)>


* [Movie無患] : 무비무환. 무비(Movie)를 보면 근심이 없다(無患). 세 번째 영화는 <파리의 딜릴리>.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 작품 <파리의 딜릴리>


# 인간 동물원, 인간 전시의 장(場)


"아름다운 보랏빛 애니메이션을 잘 봐놓고, 어떻게 이런 끔찍한 단어를 초반부터 쓰는가! 그것도 문화와 예술의 도시인 '파리'를 배경으로 한 낭만적인 작품을 보고..."
라고 혹자는  수도 있겠다.


인간 동물원. 발화하는 순간부터 오싹한 느낌이 든다.
'인간'과 '동물원'의 괴이쩍은 결합.


이 영화의 첫 장면에는 인간 동물원이 나온다. 


주인공 딜릴리의 깜찍한 얼굴이 카메라에 잡힌다. 원시부족 생활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처음부터 의아한 생각을 갖게 됐다.

이 영화의 배경은 그 이름도 찬란한 벨 에포크 시대(19세기 후반~20세기 초) 아니던가. 그런데 왜 이런 원시적인 생활상이 처음부터...


이내 곧 진실이 밝혀진다. 그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이들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그렇다. 인간이 전시되는 곳, '인간 동물원(Human zoo)'이다. '인종 전람회(Ethnological Exhibition)'로도 불렸다는데, 토악질이 나오는 단어인 것은 매한가지다.

인간이 인간을 가둬놓고 구경을 한다. 그리고 먹이를 준다. 1950년대 벨기에에 있었던 인간 동물원의 모습이다.


딜릴리는 카나키 출신이다. 영화 속에서 딜릴리는 다른 인물과 다르게 피부가 까맣다. 물론 필자 눈에는 귀엽기만 하다.


한데 이 영화를 소개하는 몇몇 기사에는 딜릴리를 아프리카 출신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틀렸다.


얼굴색이 검으면 다 아프리카에서 온 것인가? 

물론 그 글을 쓴 사람은 단순히 얼굴색 하나로 딜릴리의 고향을 아프리카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예로 끌려온 듯하 식민지 흑인을 연상했을 것이고, 그 대표적인 곳으로 아프리카 대륙이 떠올랐을 것이다. 기계처럼, 무슨 공식처럼 자동적으로.


한데 카나키는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를 가리킨다. 프랑스어로는 누벨칼레도니([Nouvelle Calédonie)인 이곳은 오세아니아에 있다. 호주, 뉴질랜드가 아프리카가 아니듯이 뉴칼레도니아도 아프리카가 아니다.   


'문명국'이라 자부했던 당시 서구 열강들은 만국박람회와 같은 대형 행사에서 위의 사진과 같은 인간 동물원을 종종 운영하곤 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민족적 우수성을 과시했고,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그러면서 저들(식민지 국가 출신 사람들)은 우리보다 열등하다, 동물원에 가둬도 되는 형편없는 존재다, 우리는 저들을 지배해도 될 만큼 모든 면에서 앞선 민족이다, 라는 우생학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냈다.
'문명국'이라 자부했던 서구 열강들이 저질렀던 시대의 야만. 이들은 인종 전시를 통해 자신들의 민족적 우수성을 과시했고, 식민통치의 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자유·평등·박애의 혁명정신을 기리는 나라 프랑스는 좀 달랐을까?


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끌려간 아프리카인들은 뼈를 갉아먹는 시늉을 해야 했다. 식인종이라는 강요된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했고 프랑스 국가대표로도 뛰었던 축구선수, 크리스티앙 카랑뵈. 그의 증조부모 역시 딜릴리의 고향 뉴칼레도니아에서 프랑스로 끌려와 우리 안에 갇혀 전시되었다.

크리스티앙 카랑뵈. 그의 증조부모 역시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인간 동물원에 감금됐었다.

심지어 우리 선조들도 일제에 의해 구경거리 신세로 전락한 적이 있다. 미개한 조선인으로 조롱받았고, 혹은 식인종으로도 묘사되었다. 참극이다.


많고 많은 애니메이션과는 도입부부터 다르다. 

초반부터 던지는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다.


# 그리고 젠더


인간 동물원 때문에 초반에 열을 좀 많이 냈는데, 이 영화 전체를 두고 보면 인종보다는 젠더에 무게중심이 더 실려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단 영화의 주된 사건이 파리 시내에서 여자 아이들이 계속 실종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아이들'이 아니라 '여자 아이들'이다.


여아들을 유괴하는 마스터맨 일당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파리에서 여아들을 유괴하는 범죄를 일삼고 있는 마스터맨 일당. 이들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

파리에서 여성이 권력을 잡으면서 세상이 이상해졌고,

여자들이 대학을 가면서 똑똑해지니 여자들 밑에서 일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세운 학교에서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는다. 물론 고작 한다는 게 어린아이들을 유괴하는 것이지만.


여아들은 발로 기는 훈련을 받는다.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있는 것임에도 심히 불유쾌한 장면이다.
끔찍하지만 적이 상징적이다. 


이들은 검은 천 뒤집어쓰고 네발로 기어 다는 것을 강요받는다. '네발 훈련생'으로 불리며 왼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으로 빠르게 기어 다니는 것을 반복해서 훈육받는다.


성인 여성도 납치되어 비슷한 신세로 전락한다. 천에 덮여 가만히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쩐지 어떤 의복이 연상된다. 움직이기 전까진 생명체 취급도 못 받는다. 마스터맨에게 이 여성들은 의자에 다름 아니다.

마스터맨에 납치되면 네발로 기어 다니는 것을 강요받는다. 검은 천에 덮여 있는 것은 사람인가, 도구인가.
검은 천과 불편한 자세가 여성이 지닌 고귀한 인간성을 억압한다. 머릿속에 여성 억압의 기제로 활용됐던 무수한 상징폭력의 산물들이 떠오른다. 전족부터 코르셋까지.


마스터맨은 '어른 네발'은 다루기 힘들다고 뇌까린다. 여아를 납치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스터맨이 원하는 질서와 의식을 어린 여자 아이들의 신체와 정신에 일찍부터 기입하려는 것이다. 참 못돼먹은 치밀함이다.


이런 폭력에 딜릴리는 용감하게 저항하고 끝끝내 탈출한다. 물론 자신만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남은 아이들을 모두 구출하기 위해 여러 파트너와 손 잡는다.


딜릴리는 영웅이다!


영화 말미에 결국 구조된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님께 달려가 딜릴리가 용감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는 딜릴리 한 명만으로 어떤 영웅적 여성상을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딜릴리는 너무 어리기도 하고, 자칫 그런 무리한 설정은 되레 너무 만화적인 해석을 낳기 십상이다. 법대에 가는 것을 꿈꾸는 오렐도 있고, 또 무수한 인물들이 협력한다.


영화 중간중간엔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루이즈 미셸, 퀴리 부인과 같은 기라성 같았던 여성의 이름이 수시로 나온다.


이들은 아이들을 구하는 딜릴리의 조력자로 등장하기도 하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물로도 나온다. 물론 짧게 스쳐간다고 해서 그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닐 터.


예술가, 인권운동가, 과학자 등 이 영화에서 운위되는 여성들의 면면을 놓치지 않는 것도 즐거운 숙제임에 틀림없다. 

아주 인상 깊었던 컷이다. 영화 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다.

여성 운동가 루이즈 미셸, 배우 사라 베르나르, 과학자 마리 퀴리! 그리고 딜릴리.
 

남자들이 만들어가는 영웅적 서사에 익숙해 있던 우리.
이런 장면이 앞으로는 더는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게 되길 바란다.



# 아티스트들과의 조우


이 영화엔 위대한 아티스트가 대거 출연한다. 건축가, 과학자, 왕세자도 나온다.

이들과의 조우가 반갑고, 무척이나 즐겁다.

딜릴리와 툴루즈 로트레크. 

툴루즈 로트레크. 

어릴 적 사고로 하반신의 성장이 멈춰버린 슬픔을 갖고 있는 화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한 명 한 명만으로도 한 작품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 총출동한다. 
에듀메이션(education+animation)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이다.
'색채의 마법사' 미셸 오슬로 감독.

미셸 오슬로 (Michel Ocelot) 감독!

놀랍게도 그는 1943년생이다. 그럼에도 누구보다 젊은, 그리고 참 맑은 시각을 가진 듯하다. 

어릴 적 아프리카 기니에서 자랐던 경험이 그의 작품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딜릴리는 늘 저렇게 교양 있고 깜찍하게 인사를 한다. 

딜릴리의 양옆으로 불세출의 아티스트 2명이 앉아 있다.

왼쪽은 <수련>, <정원의 여인들>로 유명한 클로드 모네.

오른쪽은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년들>, <시골의 무도회>를 그린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 어떤 미술 교과서가 이들을 이렇게 한 컷에 담을 수 있을까? 

왼쪽부터 화가 수잔 발라동, 파블로 피카소, 앙리 루소, 앙리 마티스, 제일 오른쪽에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영화 곳곳에 정말 많은 아티스트와 그들의 작품이 숨어 있다. 

찬찬히 음미(吟味), 아니 '음미(音美)'해보시길 바란다.



이 외에도 참 할 말이 많은 영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왔던 메시지들, 그러면서도 너무도 아름다웠던 파리의 모습, 그리고 음악과 미술의 찬란한 향연까지. 


가볍지만은 않았던 보랏빛 여행.

파리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여정에 동행해보시기를.

딜릴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이 여정에 함께 해보시기를!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참석 후 작성 (by 석혜탁 칼럼니스트)


석혜탁 :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오늘이 가벼운 당신에게 오늘의 무게에 대하여> 저자 / 칼럼니스트·강연가 / sbizconomy@daum.net (기고·강연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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