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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혜탁 칼럼니스트 May 09. 2017

장례식의 사회학, 슬퍼할 자격과 스펙의 관계

두 청년이 겪은 상이한 장례식 풍경

[석혜탁 칼럼] 장례식의 사회학, 슬퍼할 자격과 스펙의 관계


여기 두 청년이 있다. 지난달 외조모상을 겪은 A, 비슷한 시기에 조부상을 겪은 B. A와 B 모두 부모상이 아니기에 A의 어머니, B의 아버지만큼 애통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주 사랑이 유달리 각별했던 어르신들이었기에 이들 역시 영정사진을 들고 자주 고개를 숙이곤 했다.


A의 장례식은 A가 속한 대기업의 든든한 지원 아래 진행되었다. 이른바 ‘총괄적 상조서비스 지원’이란다. 장례지도사, 입관상례사, 장례관리사 등의 인력지원, 앰뷸런스와 운구 리무진 등의 차량 서비스는 물론 수의와 목관, 상복, 제단장식, 꽃바구니, 빈소 용품 등이 지원된다. 몇몇 용품에는 이 모든 지원의 주체를 당당히 드러내려는 듯 그룹의 로고 디자인이 자랑스레 부착되어 있다.


이 ‘총괄적’ 상조 서비스 지원은 단숨에 손자 A를 ‘총괄적’ 효자로 승격시킨다. A는 A의 부모님에게 장례비용의 절감이라는 ‘경제적 효익’과 친척들 사이에서 대기업 직원 아들을 뒀다(혹은 잘 키워냈다)는 ‘사회적 승인’ 두 가지를 동시에 안겼다.


장례식을 찾아온 어머니의 지인들은 슬픔에 대한 첫 번째 위로로 아들 A의 ‘사회적 안정화’를 언급했다. “어머니께서 A가 좋은 곳 취업하는 것도 보시고 아무 걱정 없이 편안히 가셨다”는 논리로 시작하여 “A 봐서라도 자네도 힘내야 한다”로 끝을 맺었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볼까 말까 한 머나먼 친척 어른들은 A와 명함을 교환한다. 명함에 적힌 그룹사의 이름을 보고 다들 한 마디씩 보탠다. 그 그룹의 역사, 최근 이슈 등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아는 아무개가 거기 협력사에 다닌다는 말도 빠트리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기업 직원 아들을 뒀다(혹은 잘 키워냈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승인’이 되었다 ©연합뉴스

분위기가 조금 다른 B의 장례식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서울 유수 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반이 지난 B는 최소 10대 그룹은 갈 거라는 친척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B의 할아버지는 B가 재수 끝에 서울 유명 사립대학에 입학하자 1학년 2학기 동안 입학금과 등록금을 모두 지불하셨다. B는 할아버지에게 언제나 ‘우리 잘난 손주’였다.


사촌동생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으며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레 용돈을 드릴 때, 할아버지는 B가 행여 상심할까 봐 그 앞에서 크게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시곤 했다. B는 ‘우리 잘난 손주’로서의 역할을 본의 아니게 자꾸 유예하게 되는 상황이 속상했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에 안부전화 역시 잘 걸지 못했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받을 때마다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최종면접 탈락 문자 한 통을 또다시 전해받은 날 저녁 9시, B의 할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황망하게 떠나신 할아버지 생각에 B는 몹시 가책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B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를 경쟁하듯 이야기하며, “B가 잘되는 걸 보고 눈 감으셨어야 했는데”라는 B에 대한 잔혹한 언어적 형벌을 어김없이 집행하였다.


B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딱히 연락을 하지도 못했다. 부모상이 아니라는 표면적 이유 아래 놓인 진짜 이유는 오랜만에 연락하여 자신의 근황(=무직)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친척 외에는 자신의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팀장과 7명의 팀원들이 두툼한 조의금 봉투를 들고 온 사촌동생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개를 숙이는지, 32세 취업준비생이라는 현실에 눌린 고개 숙임인지 분간이 안 되는 오늘의 상황을 되레 다행이라 여겼다. B의 아버지는 큰 아들(B)의 취업 관련 질문 세례에 지쳐 녹신해졌다. B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에 자신이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것 같은 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취업준비라는 긴 터널에서 상주로서 결격이 아닌가 하는 심리적 자책까지 짊어야 하는 이 시대 대부분의 청년들. 취업 못한 게 ‘유죄선고’라도 되는 냥 고개를 처박아야 하는 부박한 사회상.

취업준비라는 긴 터널에서 상주로서 결격이 아닌가 하는 심리적 자책까지 짊어야 하는 이 시대 대부분의 청년들 ©pixabay

장례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이유로 상중에 슬퍼해야 하는 청년들이 주위에 꽤나 많다. 이 이유는 대개 개인의 실력 부족에 기인하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개인사로 분류되는 장례식에 사회학의 렌즈를 들이미는 이유기도 하다. 이젠 슬퍼할 자격에도 스펙이 뒷받침되어야 하나 보다. 그래서 장례식은 슬프다.


칼럼 원문 : http://www.nongaek.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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