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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Mar 05. 2020

입장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최근에 갑자기 생긴 건강 문제로 인해 다양한 일들을 겪게 되었는데, 보고 싶던 영화를 보고 집에 가던 중 그 영화가 주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뜻밖의 장애물들을 마주했다. 계단을 잘 오르내리지 못했던 상태의 내 다리는 영화관의 그 많은 계단을 내려가야 했고, 더욱 절망적인 건 영화관이 위치한 층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으로 한 층을 내려가야만 했다.


당연시 여겨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 예를 들면, 돌리거나 세게 밀어야지만 열리는 문들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좌절했다. 만약 휠체어 없이 거동이 불가능한 사람이 이 영화관에 왔다면 어땠을까? 주변을 돌아보니 경사로는 하나도 없이 온통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뿐이다.


어쩌면 장애인들은 문화생활 아니, 일상생활에서도 우리 사회가 주는 암묵적인 제약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화관 가장 앞줄에 마련된 장애인석이 항시 비어있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렵게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에 도착하여 내 차를 향해 걸어가던 중 어떤 운전자의 신경질적인 경적소리에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채찍 같은 경적소리 이후에도 빨라지지 않는 나의 걸음을 보며 그 운전자의 표정은 한없이 굳어지다 못해 일그러졌고 나는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이며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다 어렸을 적 가족들과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갔을 때가 생각났다. 뇌성마비 1급 장애를 가진 사촌 언니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짠 것처럼 모두가 언니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난 한순간에 음식점이 고요해지는 이유가 궁금했었다. "아빠, 왜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 보면서 귓속말하는 거야?" 그때 그 질문을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로 언니를 다른 사촌들의 결혼식에서 볼 수 없었다.


나는 언니의 가족으로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보다 더 장애인의 입장을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인식조차 못 했던 전혀 사소하지 않은 불편함 들을 언니는 하루하루 마주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나만의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의 입장을 이해해.”라고 말할지라도 사실은 상대방의 입장을 처지를 내가 가진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가늠해 볼 뿐 그들의 입장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촌들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언니가 왜 모든 결혼식에 올 수 없었는지, 그 부모님은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혼자 남겨두고 결혼식에 왔어야 했는지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번 일을 계기로 나를, 언니를 움츠러들게 만든 건 아마 나와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지 않았을까 라고 느꼈다. 나와 다른 신체적 조건, 나와 다른 피부색, 나와 다른 생김새. 동정을 가장하지만 속으로 나는 저렇지 않아 다행이라는 자위에서 비롯된 시선, 혹은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무심한 시선. 나의 문제가 아니기에 한 번 더 돌아보지 않는 앞만 보고 가는 그 시선.


물론 세상은 아직까진 살만한 곳이며, 좋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 일지라도, 아직 소수의 무관심한 시선 속에 나도, 언니도, 다르다 여겨지는 많은 이들이 오늘까지도 상처 받고 있다.

영어 표현 중,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 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이 표현을 듣고 나서 떠오른 궁금증은 왜 신발일까? 였다. 왜 그 사람의 옷을 입어보는 것이 아니고 하필 신을 신어보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 생각했을까 싶었다.


그건 아마도 어떠한 행동을 취할 때 우리 몸에서 가장 먼저 나가는 부위가 발이기 때문 아닐까? 아니면 항시 땅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의 근간이 발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상황을 전부 이해할 순 없을지라도, 같은 땅을 딛고 바라보는 것이 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시작이라는 뜻일까?

거창하게 저마다의 다른 상황에 입장에 나를 이입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급적 나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육안으로 나와 다르기에 알 수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임산부석에 앉은 초기 임산부 혹은 노약자 석에 앉은 피곤한 청년들, 나와 같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실제로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향한 불편한 시선을 거두고 “그럴 만한 상황이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보는 것.


그 단순한 생각이 지금 나와, 너와 함께 서있는 그 누군가의 신을 꼭 직접 신고 걸어보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이해하는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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