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상자 같은 인생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있어요. 포레스트 검프라고 막내딸과 함께 봤던 영화입니다. 이전에 이야기했던가요? 참 살가운 아이였는데 요즘 들어 연락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하던 아이였는데 요즘은 통 연락이 없어요. 무슨 일이 생긴건가 전화를 했더니 지 마음이 편안해지면 전화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걱정말고 기다리라고만 합니다.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도통 말을 하질 않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하여간 남편과 죽으라고 싸운 다음날 대학생이었던 막내딸이 시내에서 보자고 전화가 왔어요. 나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보채듯이 졸라대는 막내는 예쁜 옷 입고 지금 동성로로 나오라고 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지가 집으로 와서 엄마를 끌고 나가겠다는데 그러면 시간도 걸리고 지가 힘들다며 그냥 나오라고 한참을 아우성이었어요.
한참 실갱이를 하다가 나는 옷장 문을 열고 예쁜 원피스 하나를 입고 화장도 곱게 하고 버스를 탔습니다. 꼭 택시 타고 나오라는 말은 들어주지 못했어요. 외국영화를 볼 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막내 덕분입니다. 다른 딸들과 달리 항상 영화관으로 불러내어 데이트 신청을 하는 예쁜 막내. 무슨 일이 있는걸까요. 자꾸만 가슴이 두근대서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1994년 가을날 저녁. 나는 그 영화를 봤습니다. 어눌한 말투와 어눌한 몸짓이 참 안타까운 사람이었는데 그 엄마가 하는 말이 내 머리에 콱 박혔어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거야. 어떤 걸 가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이 말을 외우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막내에게 그 초콜릿 어쩌고라고 했던 말을 적어달라고 했더니 수첩에 곱게 적어줬어요. 나는 이 글을 아침마다 읽고 밤마다 읽었습니다. 내 인생을 달콤한 초콜릿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다가 문득 막내의 전화번호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그냥 핸드폰을 내려 놓았습니다. 아무래도 걱정 어린 말만 늘어놓을 것 같고 그 말을 들은 막내는 더 힘이 들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나의 막내는 엄마를 닮아서일까. 막내의 초콜릿은 아직 그렇게 달콤하지 않습니다.
영화관에서 막내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팝콘을 사줬어요. 그게 뭐가 맛있다고 아까운 돈을 써서 그런 걸 사먹는지 한소리 하긴 했지만 그게 맛으로 먹는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막내와 함께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며 팝콘을 먹던 시간들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한참동안 엄마를 챙기던 막내가 어느날 퉁퉁 부은 눈으로 집을 찾아와서는 미안하다며 펑펑 울었던 날도 사진처럼 남아 있고요
고된 시집살이와 지랄같은 남편과 한평생을 살아온 이유는 내 자식들에게 엄마 없는 집을 만들어주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내 딸들은 생각과는 달리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애지중지 했던 막내는 불안한 시간들을 살아가면서도 항상 내 앞에서만큼은 웃는 모습이었는데 그 아이가 울었던 날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오늘은 마음이 불안해서 글이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합니다. 그래도 글을 쓰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막내가 내 손을 잡았어요.
"엄마. 초콜릿이 달지만은 않아. 쓰기도 해. 다크 초콜릿은 진짜 써. 그런데 그것도 맛있다고 사서 먹어. 그게 더 비싸. 근데 그 맛없는 걸 왜 더 비싼 돈 주고 사 먹는줄 알아? 그걸 먹으면 진짜 초코맛이 느껴져. 더 깊은 맛이 느껴지거든. 그걸 먹고 나서 설탕이 잔뜩 들어간 달달한 초콜릿을 먹으면 막 행복해져.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인생은 그런거래. 쓴 맛을 보고 나서야 진짜 인생을 알 수 있고 또 진짜 단맛의 소중함을 알 수 있거든. 비싼 돈 내고 인생의 쓴 맛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보자고 하면, 엄마. 내가 너무 남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