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에게 불친절할 때
파스라도 사주고 가던가.
아주머니의 말이다. 무슨 상황이냐고? 아침에 어딜 다녀오던 도중 자전거로 앞 자전거를 치고 만 것이다. 내 자전거 핸들에 허리가 찍혔다고 말씀하시는 아주머니는 허리가 아프셨는지 나에게 재차 미안하다면 다냐고 말씀하셨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이 없어 앵무새처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말하는 나에게 아주머니가 위와 같이 말씀하셨다. 파스라도 사주고 가던가.
하지만 더 죄송하게도 알바 시간이 빠듯해 그렇게 약국에 아주머닐 모시고 가 파스를 사드리고 재차 죄송함을 표할 시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너무 죄송하다며 계좌이체로라도 파스값을 보내드리겠다는 나에게 아주머닌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냥 가라고 말씀해주셨다. 감사했다. 다시 잰 발걸음으로 페달을 밟아 나의 현재 일터 빵집으로 향한다. 오늘도 10시까지 근무한다. 9시간 근무다. 빡세다. 9시간 사무실 노동과는 또 다른 피로감이다. 말하자면 순수한 피로감. 사무실에서의 피로가 복잡한 심경에서 오는 심적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었다면 빵집에서의 피로는 단순하다. 다리가 붓고 허리가 저려온다. 쉴새없이 쟁반을 들었다 놨다 대걸레를 민 어깨가 쑤셔온다. 신체에서 오는 피로는 곧 정신의 한계로 이어지지만 사무실과 다른점은 이 한계를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이다. 웃자. 웃어야한다.
어서오세요! 와 어서오(웅얼)ㅅ... 은 확연히 다르다. 우선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전자인 가게에 들어서면 기분이 좋다. 나는 알바생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노동을 바라지 않지만 친절함을 먼저 제공하는 알바생에겐 어쩔 수 없이 약해진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한다. 마스크 속이지만 웃는다. 기계 같더라도 인사한다. 나가는 뒷모습에 괜히 꾸벅 한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부류라면, 어쩌면 별 변화는 없어 보이지만 심적으로는 작은 기쁨 한 조각을 사서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9시간 친절을 판다. 빵을 파는 대가로 받는 건 9160원의 시급이라면, 9시간 판 친절의 대가는 뭘까? 당연하지만 없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게 하래? 기본만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기본'이 다를 수도 있음을 가정하지 않는다. 나에게 누군가를 대하는 일은 예의를 갖추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떨지를 생각하는 일인데 남들은 뭣하러 그렇게 하냐고 한다.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손해다. 그렇게 생각하면, 친절을 대가없이 베풀고 나누면 길거리에서는 자잘한 불친절이 나를 맞는다. 어깨를 그냥 치고 지나간다. 다음 알바생을 위한 비품 정리는 되어있지 않다. 카드를 휙 던진다. 상관없는 일들이 나에게 분노를 한바탕 쏟아놓고 간다. +1의 대가가 -100이라니 세상의 불균형에 입이 댓발 나온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 분노해 나도 거기에 -1을 더하려다가, 한숨 한 번 푹 내쉬고 편의점에 들어가 껌을 한 통 산다. 말그대로 씹을 무언가가 필요해서다. 씹고 불고 터뜨리고 다시 입안에서 굴려 씹는 행위로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이 나에게 불친절만 줄지라도 나는 또 껌 한 번 씹고 친절을 팔러 간다. 달고 말랑하다. 그러면서 이 풍선껌은 내가 누군가를 씹고 싶고 터뜨리고 싶고 이 사이에 끼고 갈고 싶은 마음을 풀어준다. 오히려 단물이 나올 때마다 내가 누그러진다. 그래. 뭐시 중허건냐. 나는 그러지 말자. 그렇게 껌 하나 씹고 난 오늘도 친절 팔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