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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Jul 29. 2019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여름이 불러오는 맛의 기억


방 하나가 서쪽으로 창이 나있어서 유독 덥다. 여름 날 오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도 열기를 몰아내지 못하는 방이라 선풍기를 하나 사서 들여 놨다. 요즘 선풍기는 깜찍하기도 하지. 앤틱 소품 같은 디자인이 예쁘기도 하고, 선풍기 바람을 쐬어본 게 언제였나 싶기도 해서 공연히 전원 버튼을 눌러놓고 그 앞에 얼굴을 대고 있어본다. 머리카락을 날리는 선풍기 바람을 맞고 있으니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 생각이 유독 여름에 더 많이 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사실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계시던 기간은 계절과 관계가 없었다. 그저 아무 때고 아들한테 서운하고 며느리한테 삐지시면 딸네 집으로 이동해서 마음이 풀릴 때까지 계시다 가곤 했던 것 같다. 그때야 어리니까 나는 어른들의 신경전 같은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할머니가 오시면 그저 반가워서 좋아라 하곤 했었는데, 그 기간은 할머니한테도 외숙모한테도 고부간 갈등의 휴지기가 되어 원망의 마음을 삭힐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우리 집에서 떠나실 때도 비슷한 이유로 떠나신다는 것인데, 그만큼 우리 외할머니 성미가 만만치 않으셨다.


할머니는 바싹 마른 체구에 쉴 새없이 몸을 움직이는 부지런한 성격이셨는데, 그 덕에 할머니가 오시면 집이 반짝반짝해지곤 했다. 그토록 살림에 대한 기준이 높았으니 며느리에게고 딸에게고 얼마나 잔소리를 하셨겠는가. 아무리 말려도 시시때때로 바닥 걸레질을 하셨고, 그러다가 중간중간 걸레를 뒤집어 보이시고는 “아이고, 이 먼지 봐라 먼지!” 하면서 딸에게 눈을 흘기시기 일쑤였다.


심심하시면 냉장고를 뒤져서 낭비하는 게 없나 참견하시고, 부엌 살림살이를 죄 꺼내 구석구석 닦으며 손주들이 듣던말던 당신만큼 손끝이 야물지 못한 딸을 흉보시는 등 오실 때마다 일을 사서 하셨다. 참다 못한 엄마가 그만 좀 하시라고 신경질을 내게 되면 결국 말다툼이 되고, 결국 골이 나신 할머니가 짐을 싸서 외갓집으로 가버리시는 식으로 할머니의 우리 집 기거는 종말이 나는 거였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손주들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서셨고, 그 뒤를 엄마가 부랴부랴 따라나가 택시를 잡아드리며 할머니의 핸드백에 봉투를 쑤셔넣어드리곤 했다. 할머니의 떠남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난 할머니가 오시면 좋았다. 엄마나 외숙모한테는 그 과도한 부지런함과 잔소리가 고통스러웠을지언정 어쨌든 할머니가 계시면 뭔가 집 안팎이 수선스러워지는 것 같으면서도 시골스러운 활기가 도는 게 신이 났다. 특히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살 때가 더 그랬는데, 마당의 수도꼭지 주변에 씻어놓은 여름 푸성귀들이 잔뜩 쌓여있다든가, 복숭아나 참외 같은 것들이 고무 함지 속 차가운 물에 둥둥 떠있는 정경 같은 것들에 마음이 풍요로워지곤 했다.


출출한 오후면 할머니는 포만감에 제격인 간식거리를 만들어내시곤 했다. 무더운 여름 날, 땀이 찬 다리에 쩍쩍 달라붙는 마룻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할머니가 부엌에서 가지고 나와 부려놓으신 부침개나 수박화채나 찐고구마 같은 걸 둘러앉아 먹던 기억은 어린 시절의 행복한 여름 삽화다. 에어컨도 없던 시절이어서 좌우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방향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차지하려고 동생들과 투닥거리며 할머니표 주전부리를 먹던 추억.


특히 내가 좋아했던 것은 할머니가 놋쇠 양푼 한 가득 타서 얼음을 둥둥 띄워주시던 미숫가루, 그리고 호박 부침개였다. 할머니의 호박 부침개는 여름이면 물이 오르는 애호박을 숭숭 채썰어서 밀가루 반죽에 섞어 부치는 간단한 건데, 그걸 널찍한 소쿠리에 쭉 펴놓고 식힌 다음 손으로 쭉쭉 찢어 먹으면 별미였다. 그건 방금 부친 것보다 식혀서 쫀득해져야 제맛이었다.


맛이 그리운 건지 시절이 그리운 건지, 가끔 먹고 싶어져서 미숫가루나 호박 부침개를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내가 하면 그 맛이 나질 않는다. 놋쇠 양푼 미숫가루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소쿠리에 펼쳐 식힌 부침개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 물맛이나 호박맛이 한국 것과 달라서 그런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기억하는 맛을 낼 수 없는 것에 실망한 나는 미숫가루와 호박 부침개는 이제 만들지 않는다.


그밖에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보던 할머니가 저딴 건 나도 추겠다며 방방 뛰시던 통에 동생들과 숨이 멎도록 웃던 일이나, 할머니와 초콜릿을 나눠먹다가 장난기가 발동해 할머니한테 ‘쪼꼬렛’말고 미국식인 ‘촤컬릿’으로 말해보라고 요청하고는 계속 똑같은 발음에 언성만 높이는 할머니 때문에 종래에는 어깨를 들썩이며 함께 킬킬 웃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내가 운전을 하고 다니던 시기가 되었을 때는 할머니도 연세가 많이 드셔서 병원, 외갓집, 우리집을 번갈아 가며 지내셨다. 하루는 엄마 심부름으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와야 하는 날이 있었다. 소화기능을 잃어가던 통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진 할머니를 잠실 외갓집에서 분당 우리 집으로 차에 태워 모셔오는데 뒷좌석에서 할머니가 웅얼웅얼 말을 하셨다. 운전석 백미러로 흘끗 보니 할머니가 공허한 눈길로 창밖을 보고 계셨다. 뭐라고 하신 거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휘휘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어디 멀리, 멀리 좀 가!”


멀리? 하고 내가 묻자 할머니가 힘없이 고개를 주억이셨다. 잠깐 생각을 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할머니를 얼른 집에 모셔다 드리고 ‘그놈의 압구정동’에 가야 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오늘 말고 다음 번에 드라이브를 시켜드리겠다고 하고는 그냥 집을 향해 달렸다.


되도록 천천히 가려고는 했지만 개통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의 분당 수서 간 도로는 그날따라 어찌나 시원하게 뚫리던지 주행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난 예정대로 할머니를 우리 집에다 모셔다 드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그런데 그날이 할머니를 내 차에 태워드린 마지막 날이 되는 바람에 결국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할머니는 거동 자체를 거의 못하셨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내가 해외에 나가있는 동안 돌아가셨다. 당시 워낙 연세도 많으셨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서 그런지 슬프다는 마음 외에 따로 맺히는 건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날 내가 할머니를 모시고 그 어딘가 ‘멀리’로 가지 않았던 게 사무친다.


친구들과의 약속 쯤 취소하고 곤지암 같은데 드라이브라도 가서, 그 유명하다는 소머리 국밥 같은 것도 사드리고, 할머니는 한 번도 못 가봤을 교외의 카페 같은 곳에서 젊은 사람들이 사먹는 음료 같은 것도 맛보게 해드리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왜 그날, 그 어렵지도 않은 부탁을 무시하고 할머니를 보냈을까.


선풍기가 놓인 이 사진. 큰 아이 방이다. 내가 사와서 걸어준 벽 장식품에 쓰인 글귀, Love is the best ingredient. 사랑이 최고의 성분. 현재 고등학생인 이 방 주인은 벽장식의 문구를 처음 봤을 때 피식 웃었다. 오글거린다는 게지. 짜아식. 포동포동한 팔뚝이 귀여워 미치겠어서 하루에도 열두번씩 깨물었던 게 엊그제 같구만.


가만. 그 습관이야말로 할머니가 물려준 것이었지.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홀몸으로 남매를 키워낸 할머니의 유일한 취미였던 청자 담배. 그로 인해 누렇게 변색된 치아가 가끔씩 내 어린 팔뚝을 장난스레 깨물면, 나는 괜스레 과장해서 우는 체를 하지 않았던가. ‘어이구 내 강아지.’ 하는 소리가 듣기 좋으면서도.


벽장식 글귀에 다시금 눈이 간다. 그래. 여름만 되면 그리운 그 맛을 내기 위해 필요한 건 놋쇠 양푼이나 소쿠리 따위가 아닌 거겠지. 시큰해진 코끝, 선풍기 바람이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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