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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송 Sep 06. 2019

그러게, 진짜 언제 놀지?

영화 <우리들>


가끔은 평을 하는 대신 그냥 오롯이 느끼기만 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어떻게 찍었을까, 왜 이 대사일까에 더 집중하다보면 "그럼 영화는 언제 즐겨?" 하는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드는 영화들. 다짜고짜 좋다고 말하고 싶은 영화들. 별점이란 수치로 딱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하고 싶지도 않은, 감응만을 오롯이 간직하고 싶은 영화들. 그리고 <우리들>은 몇 안 되는 그런 영화들 중 하나이다.     


'나, 너, 우리'라는 벤다이어그램

우리는 모두 ‘나’라는 각자의 우주를 품고 있다. 그런 ‘나’가 ‘너’라는 또 다른 우주를 품은 타인을 만난다. 외따로 떨어진 우주였던 ‘나’와 ‘너’는 서로 어우러지며 교집합을 이루기도 하는데 그 교집합은 ‘우리’가 된다. 관계의 벤다이어그램에서 가장 속살에 있는 것은 ‘우리’다. <우리들>도 나와 너, 선(최수인)과 지아(설혜인)의 벤다이어그램을 보여준다. 선은 반에 단짝친구가 없는 외톨이었다. 방학식 날도 홀로 반 청소를 하던 중 교실에 온 전학생 지아를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의 집을 오가며 금세 친해진다. 그 해 선이는 지아와 가장 즐거운 여름방학을 보내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조금씩 감정이 부딪히는 때가 늘어나면서 균열도 생긴다. 개학 후 전학 온 지아는 선이에게 서먹하게 굴고 선이를 따돌리는 보라와 가까워진 눈치다. 처음 ‘나’와 ‘너’였던 각각의 선과 지아가 친해지며 속살을 공유하는 ‘우리’가 되었다가 서로의 약한 속살을 폭로하며 다시 ‘나’와 ‘너’로, 각각의 존재로 돌아가기도 하는 치열한 벤다이어그램 변화의 역사가 바로 <우리들>이다.



필터 없이 아이들을 보여주는 영화

<우리들>은 어린이들이 마냥 착하고 순수하게만, 어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이들 모습만 보여주지 않는다.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우리들>은 청량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도 청량한 필터를 끼워 아름답게만 보려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위선이란 가면을 쓸 줄 아는 어른들보다 더 치열하게, 더 솔직하게 세상과 충돌한다. 피구에서 팀을 나눌 때, 보라는 선이가 같은 팀이 되자 다른 친구에게 “이선 못한단 말이야. 민철이랑 바꾸면 안 돼?”하고 선도 친구들도 관객들도 잘 들리게 말한다. 오히려 어른이었으면 앞에 대고 하지 못했을 말도 서슴없이 면전에, 친구들 다 있는 앞에서 내뱉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보라는 선에게 “농담인거 알지?”하지만 선이는 안다. 그걸 보는 우리도 안다. 그냥 농담이 결단코 아님을. 그렇게 아이들은 투명하고 솔직해서 때론 어른들보다 더 잔인해지기도 한다. 금을 밟지 않은 아이에게 밟았다고 우겨 기어코 내보내는 것도, 보라가 생일파티에 가짜 주소를 알려주며 선을 초대해 골탕 먹이는 것도, 생일파티에 초대한다는 미명 하에 선에게 청소를 대신 부탁하는 것도, 도둑으로 몰아가는 것도. <우리들>은 뽀얀 얼굴의 아이들이 마냥 순수하고 여린 존재만은 아님을 애써 숨기지 않는다. 필터 없이 아이들의 삶을 보여주려 한다.


그렇다면 보라는 악당처럼 보일까? 또 그렇진 않다. 보라는 못된 구석이 있는 아이지만 보라의 보라만의 삶을 가지고 있고 영화는 이를 일부러 생략해버리진 않는다. 지아에게 반 1등 자리를 내주고 학원에 일찍 와 울고 있는 보라를 보면 보라에게도 안쓰러운 아이의 구석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보라가 갑자기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선은 그 이름만큼 선하고 친구들에게 주로 당하는 쪽이긴 하지만 가끔은 친구의 아픈 곳을 공격하기도 하고 동생을 때리는 아이를 쥐어박아 울리기도 한다. <우리들>은 아이들을 선과 악으로, 캐릭터로 판단하는 대신 아이도 어른도 아닌, 한 명의 사람 그 자체로 그려낸다. 영화는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고 순수함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인간임을 드러낼 뿐이다.           


욕망 없는 카메라

또한 <우리들>은 아이들이 가진 아픔을 전시하고 탐닉하며 훔쳐보려는 욕망을 일절 가지고 있지 않다. 현장감을 불어넣는다는 미명 하에 선이가 따돌림 당하는 순간을 전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 태도는 영화의 처음, 피구하는 첫 시퀀스에서부터 곧바로 드러난다. 첫 시퀀스에서 반 아이들 중 두 명은 가위바위보하여 한 명씩 반 친구들을 자기 피구팀으로 데려가는 중이다. 아니, 데려가는 중일 것이라고 관객은 생각한다. 한 명씩 데려가는 것은 보이스오버로만 표현되고 우리는 계속 선이의 얼굴, 선이의 표정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선이만 바라본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영화는 원경으로 선이만 두고 한 명씩 팀으로 나누어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선이 주변으로 한 명씩 줄어드는 모습도 그다지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조금 뒤로 물러나 선의 주변이 휑함을 드러낼 법도 하지만 카메라는 꿈쩍도 않을 뿐이다. 관객은 그저 아이들 말소리와 웃고 있던 선이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변화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선이의 감정은 관객에게 오롯이 가닿는다. 혹은 그래서 관객들은 선이의 얼굴만 볼 수 있기에 아주 미세하게 변해가는 선이의 감정변화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영화는 후반부에 딱 한 번, 카메라가 알코올중독자라고 쓰인 잔인한 칠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만 그것마저도 선이 스스로에 의해 금세 지워져버려 관객들이 더는 볼 수 없게 만든다. 상황을 장황하게 전시하지 않아도 감정을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음에 놀랐다. 동시에 그동안 시각적 정보전달이란 미명 하에 아픔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던 영화들이 과연 훔쳐보려는 욕망, 탐닉의 욕망이 무의식에도 정말 전혀 없었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보려고 ‘애쓰는 어른’의 시선

<우리들>에게 붙는 찬사 중에 아이들의 시선, 아이들 눈높이에 딱 맞는 시선이란 칭찬이 많다. 아이들의 입에 잘 붙는 대사로 그들의 시선을 적극 반영했다는 감독의 말 대로 이 영화는 아이다운 영화이지만 나는 이 표현은 약간은 부족하다고 여겼다. 아이다운 영화 앞에 수식어가 붙어야 하는 영화. ‘어른관객들이 보았을 때’ 아이다운 영화. <우리들>이 완전한 아이들의 시선이라 말하기엔 어딘가 딱 맞지는 않다고 느낀 것이다. 영화는 (긍정의 의미로) 아이들이 아닌, 성인의 제작진이 만든 영화임을 완전히 감추진 못한다고 느꼈는데 이는 아이들의 시선 치고는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휩쓸리고 서로의 눈치를 보는 아이들에 비해 카메라는 무척이나 담담하다. 선과 악을 나누는 대신 그저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말 것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카메라는 무척이나 어른스럽다. 선이처럼 아이인데 어른스러운 시선이 아니라 그 반대. 어른인데 아이처럼 순수한 시선이 <우리들>이 가진 시선의 정확한 정의가 아닐까?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시선을 이젠 정확히 판별할 능력이 없다. <우리들>의 아이들이 진짜 아이답다고 확신하는 대신 <우리들>에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어떻게 세상이 보일 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노력하는 어른의 시선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우리들>에는 아이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성숙하고도 순수한 어른의 시선이 담겨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바라보되 훔쳐보지 않고 보여주되 탐닉하지 않는, 계속해서 애를 쓰는 어른의 시선. 우리 어른들은 절대로 아이들의 시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부단히 아이들의 시선을 다시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선. '거의' 아이들에 가까운 시선.



데칼코마니

<우리들>은 '아이들'의 영화이지만 한편으로는 '반복'의 영화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요소가 2번 반복된다. 그러나 데칼코마니가 양쪽 면의 형태는 똑같지만 좌우가 뒤바뀐 것처럼, 그래서 결국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 또한 여러 요소들이 한 번 더 반복되지만 조금은 변주되는 양상을 보인다. 선이와 지아의 첫 만남에서 “뭐 봐?”하고 교실을 보는 지아에게 물었던 선은 같은 날 “뭐 봐?”하고 육교 밑을 내려다보다가 지나가던 지아에게 똑같이 질문 받는다. 선이는 학교에서의 외톨이지만 집에선 씩씩한 딸, 든든한 누나로 사랑받는다. 지아는 학교에서는 외톨이가 아니지만 집에서는 외톨이에 가깝다. 선의 아버지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화를 내고 술을 마시고 지아의 할머니는 엄마 이야기를 하면 화를 낸다. 선이가 정성껏 만든 보라의 생일선물 팔찌는 보라에게는 전해지지 않지만 후에 지아에게는 온전히 전달된다. 놀이터로 뛰어갈 때는 선이가 먼저 뛰어가는 모습이 원경으로 보여지지만 후에 문구점에서 나와서는 지아가 선이 먼저 뛰어가는 모습을 똑같이 원경으로 보여준다. 지아가 선의 집에 일주일 살 때 엄마와 친한 선이를 보고 지아는 김밥을 먹지 않지만 후에 현장학습에 가서는 김밥을 먹는다. 그러나 곧장 보라가 지아를 주려고 샀던 핫도그가 바닥에 떨어지고 똑같이 지아 주려고 싸온 선의 김밥이 흙바닥을 뒹군 모습이 제시된다. 붉은 봉숭아는 민트색의 푸른 매니큐어로 변주되고 영화에서 선이는 윤이를 거리에서 한 번, 학원에서 한 번 총 두 번 찾으러 다닌다. 영화의 시작에 피구하는 상황에서 선이가 소외를 당했다면 영화의 마지막 피구하는 때에는 지아가 소외당한다.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하고 선과 지아에게 무안함을 주는 보라의 대사도 두 번 반복된다. 거의 모든 요소가 두 번 등장하는 셈이다. (TMI 하나. <기생충>의 원제는 <데칼코마니>였다고 하니 묘하게 대구를 이루는 지아와 선이의 영화 <우리들>과 기택네와 박사장, 두 4인가족의 대구를 이루는 <기생충>이 데칼코마니처럼 느껴진다. 똑같이 아이들, 어른들의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다른 좌우의 데칼코마니처럼 한 영화는 희망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반면 한 영화는 절망에 가두고 끝이 난다.)



그럼 언제 놀아?

그러게 언제 놀지?

많은 이들이 명대사로 꼽은, 영화 후반부 윤이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곱씹어보고 싶다. 친구가 때리면 또 때려야 하고 또 때리면 때려야 한다는 누나의 말에 "그럼 언제 놀아?" "나는 놀고 싶은데."하는 윤이의 대사. 어른들은 절대로 생각해내지 못했을 너무나도 천진한 대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 기사에서 “왜 어린이만 주인공으로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윤가은 감독은 “왜 어른만 주인공으로 찍어야 하느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과연 <우리들>의 감독답게 되바라지고 순수한 대답이다. 그러게, 정말 때리기만 하면 대체 언제 놀지? 영화에 어른들만 등장하면 대체 아이들은 언제 등장하지?


어쩌면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강인한지도 모르겠다. 반창고를 붙이고 밴드를 붙인 채로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아니 상처가 나자마자 곧바로 다시 함께 노는 아이들. 그런 강인한 아이들이 잇속을 따지느라, 혹은 상처날까봐 못 노는 어른들에게 말한다. "그럼 언제 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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