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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송 Sep 06. 2020

의료진을 미치게 하는 '그 환자'

소설 『그 환자』

컨셉이 후킹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 되면 설레면서도 두렵다. 기발한 발상을 뒷받침해줄 이야기 전개 능력이 있을지 시작만큼 마무리도 재미있을지 걱정되어서. 소설 『그 환자』의 경우도 같았는데, 이 소설의 발상은 근래 보았던 소설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의료진을 미치거나 자살하게 만든 접근 금지 환자’. 소개 문구 첫 줄에서 나는 이미 매료됐다. 의료진이 더 위험해지는 환자라니! 추리·미스터리·스릴러 장르의 콘텐츠를 많이 봐 온 내게도 무척 후킹한 발상이었다. 읽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혹시 이 발상이 클라이막스이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기우였다. 앉은자리에서 나는 단숨에 이 소설을 읽어나갔고 미스터리의 비밀을 안 채로 작가의 떡밥(?)을 직접 회수하러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훑어보았다.


이 소설은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 페이지에 “본 원고는 ‘나는 어쩌다 의학을 포기할 뻔했는가’라는 제목으로 웹에 기재되었고 원작자가 필명으로 쓴 데다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내용은 바꿔놓은 바람에 작가의 정체라든가 여타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는 알아내려 해도 알 수가 없었다”라고 적혀있는데, 나는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 도입부가 연상되었다. “This is a true story.”의 자막으로 시작되는 <파고>는 곧이어 “생존자들의 요청으로 이름은 바뀌었으나 나머지는 발생한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건 뻥(!)이다. 그러나 이 농담의 진위를 모른 채 우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속 사건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파고>는 진위가 밝혀졌지만 이 소설의 진실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더 재미있는 도입부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드라마에서 시작할 때부터 이 드라마에 언급된 것들은 모두 허구이며 어쩌다 실제와 맞아떨어지더라도 우연이다 하는 식의 자막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인데(드라마 시작부터 김이 새는 느낌이다. 뒤에 배치하면 안 되나? 싶은데 피치 못할 이유가 있겠지.) 정반대로 이렇게 사실인데? 하며 다소 뻔뻔하게 시작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만나면 흥미도가 무척 상승한다. 독자와 관객들의 몰입감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느낌이랄까. 이 도입부 덕분에 더욱 재미있게 미스터리 속으로 더욱 빠져들 수 있었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그 환자’라고 불리는 미스터리한 환자 ‘조’는 6살에 처음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30년째 수용되어 있는 환자다. 그를 치료했던 의료진들은 거의 다 미치거나 자살했는데 이를 알면서도 혈기왕성한 젊고 유능한 의사이자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그 환자를 치료하고 싶어 한다. ‘나’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대체 이 환자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발상이 가장 매력적인 소설임은 틀림없지만 중간부터 무너져내려 결말에서는 헛웃음이 나는 그런 소설은 전혀 아니다. 생각보다 사건이 쉽게 해결되어 가는 듯하다고 방심해서도 안 된다.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이야기는 끊임없이 방향을 틀고 뒤집힌다. 어? 어, 어? 하면서 읽게 되는, 흥미로운 미스터리 소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추리·미스터리·스릴러 장르의 콘텐츠는 스포일러가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스포일러를 알더라도 감독이 구현해낸 화면을 감상하는 데 의미가 있는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소설은 글로 쓰였기 때문에 더욱 스포일러가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Daum에서 '그 환자'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딱 '그 환자 결말', '그 환자 스포' 두 개가 있다. 발상이 기가 막히니 결말이 궁금해 죽겠는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직접 그 환자의 비밀을 추측도 해보고 의심도 해보며 미스터리 소설의 즐거움을 꼭 누려보시길 바란다. 그래서 결말 스포일러 관련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스포일러는 뺀 채 이야기하자면 20세기 폭스사에서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나는 한국으로 배경을 옮기고 한국적인 요소를 넣어 각색하면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환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결말 부분 때문인데 소설을 읽어본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지점이기도 하다.


p.s. 도입부에서 웹에 실제로 기재된 이야기라고 쓰여있었다고 언급했는데 지금 글을 쓰려고 책 정보를 찾아보다 저자 소개란에 본명과 신원도 알려진 바 없다고 쓰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혼란스럽고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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