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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리핵주먹 Apr 25. 2024

저는 아프리카 말라위에 6개월 살았었는데요

약간 후회가 됩니다.

말라위는 동아프리카대륙의 중앙쯤에 있는데, 구글맵을 켜서 탄자니아를 먼저 찾은 다음 확대를 쫙-해야 보인다.  

많이들 알고 있는 탄자니아에 붙어있고, 많이들 모르고 있는 모잠비크, 잠비아와도 붙어있다. 바다에 접하지 않고 철도가 없어서 대륙에 있으나 교통은 섬처럼 불편하다.

간혹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들이 나라 하나 더 찍고 잠비아의 빅토리아 폭포를 육로로 가고자 들르기도 하는데, 아무리 좋게 봐도 주변국의 걸출한 관광지에 비하면 굳이 찾아올 만한 나라는 아닌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에는 굉장히 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NGO단체소속이다. 최빈국이기는 하지만, 내전이 없고 비교적 정치, 사회적으로도 안정적인 나라라 그렇다고 들었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여서 브리티쉬 본 인도인과 어디에나 있는 중국인도 많다. 그리고 한국인도 정말 많다.


말라위에서의 경험을 글로 옮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사실 연재의 첫 글을 말라위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나무위키 같은 첫 문단 이후로 쉽게 써지지 않아서 킬리만자로로 대체하였다. 그 이유인즉슨, 이름부터 생소한만큼 누가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고, 더군다나 너무 좋은 곳이니 당신들도 가보시라-하고 추천할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불분명하니 중언부언할 것이 분명하여 억지로라도 말라위에 대해 뭔가를 쓴다면 그건 오로지 나를 위해서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그때가 아니고 지금인가? 왜 그때 쓴 일기를 긁어 모아도 a4 한 장이 안 나오는 걸까?

그 당시에는 시도 때도 없이 전기가 나가서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같은 이유로 해가 지면 일찍 잠들었기에 늦은 밤 상념의 시간을 보내며 일상의 경험을 곱씹고 기록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전력공급을 위해 낮동안 손바닥만 한 태양열판을 열심히 덥혀두었으나 커다란 태양의 힘은 라면 뽀글이에 부을 뜨거운 물 한 컵 정도였다. 이제와 생각하니 성능 좋은 랜턴을 하나 두고 손글씨를 썼어도 될 텐데,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엄청난 ‘다름’을 겪는 것으로도 만족스러웠나 보다. ’글’이라는  새로운 함수박스를 통과시켜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굉장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에 우선은 미뤄두었는데, 그것이 벌써 7년이 흘러버렸다.

이건 좀 과한데? 싶을 정도로 가까운 하늘과 아주 아주 커다란 뭉게구름들이 눈에 선하고, 걸림 없이 불어오는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는데, 거기에 있던 ‘나’를 기억하는 것은 목구멍에 손을 넣어 구역질을 해야 하는 느낌인 것이다. 이 불편한 마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대단한 봉사정신을 가지고 간 게 아니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오? 이참에 아프리카 여행하면 딱 좋겠다!라는 가벼운 마음이 먼저 들었고 끝까지 그게 다였다.

대학생 때 네팔로 1주일간 단기 해외 봉사를 간 적이 있는데, 의미 없이 태권도를 자랑하고 쓰레기를 주우며 시간을 보내다가 실컷 관광을 하고 돌아왔다. 이것이 봉사인가?라는 마음이 들 즈음에 동행하신 책임자께서는 한국에서 봉사시간 많이 채우면서 열심히들 사셨으니 이런 걸로 보상받으시는 거라며 내 의심을 거둬갔다. 아 해외봉사란 이런 거구나? 그리하여 1주일이 6개월이 되었음에도 내 목적성을 분명히 하기가 어려웠다. 말라위에 도착해서도 많은 시간을  어디를 놀러 가면 좋을지 탐색하며 지냈다. 그중에 뮬란제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었는데, 바로 그 산에서 등산을 하던 외국인이 타이어에 갇힌 채 불 탄 사건이 있었다. 물통에 빨대를 연결해서 마시면서 등산을 했는데, 그것을 흡혈귀라며 주술사가 불태웠단다. 미신적인 이유로 백색증이 있는 사람을 사냥해서 지니기도 하고, 수출한다고도 들었다. 이런 유의 말도 안 되는 전래동화 같은 사건을 많이도 들었는데, 이 이야기들처럼 같은 나라라는 것이 이상스럽게 느껴질 만큼 나는 손오공 구름을 타고 다니 듯 지냈던 것 같다. 진짜 땅을 딛고 있지 않은 느낌말이다. 겉으로는 국립병원을 다니며 임시 면허도 받고, 가끔 시골로 봉사도 가고, 주어진 일터에서 근무 시간에는 열심히 일을 하였다. 사진으로 보면 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나의 마음은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질문에 명쾌히 ‘보상받으시라’하며 답해줄 책임자가 계시지 않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부유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마음을 꾸준히 괴롭힌 것은 나의 존재 자체였다. 앞서 말했듯 말라위에는 코이카를 비롯한 국제구호단체 소속의 청년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하는 대화 속에서 나는 겉돌았다. 도덕성과 세계시민의 의식이 매질당했다. 나는 그동안 너무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지냈었다보다. 그들의 숭고한 목표과 비전 앞에 자꾸만 작아졌다. 나도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장애인센터로 구강교육을 나간 적이 있는데, 청각 장애인 앞에서 칫솔질의 필요성을 떠들었다. 나는 한 참 모자랐다. 놀고먹으려고 여기 온 애. 내가 나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나는 왜 저들만큼 숭고한 마음이 없을까? 나 스스로는 어려운 환경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쉽게 엘리트코스를 밟고 그 결과를 양껏 누리고 있는 화이트 칼라였다.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내내 찝찝했다. 지속적인 인풋이 있었어도 갑자기 국제구호의 사명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콜링으로 여기에 와있다고 믿었어야 했는데, 나의 신앙심은 겨자씨 만한 것이라 그것도 안 통했다. 그래서 여행에 집착했고, 일과 후에는 반야심경을 들었다. 3g가 터지지 않고 2g가 터지는 것이 나의 ‘고’의 근원이었고, 집에 가면 전기를 좀 아껴 써야겠다는 헛웃음 나는 다짐만 욕된 일기장에 남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은 썩 편하지 않다. 어딘가에 후원금을 보내는 단기성 이벤트로 끝날 확률이 더 높다. 마음이라는 것은 꾸준히 돌봐야 하는데, 지금의 나는 내 자식이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에 함몰되어서 앞만 보도록 판때기를 달고 있는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다. 그러니 지금이 적기일 수 있겠다. 다시 들여다보고 고민하여 더 나은 어른으로 살아가도록, 또 한 번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의 힘을 느껴보려고 한다.


그래, 시작이 반이라니 우선 두서없이 떠들어보도록 하겠다. 마구마구 떠오르는 이미지를 먼저 기록해 보련다.


우선 릴롱궤로 말할 것 같은면 말라위의 수도인데,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 맞추기에 통달한 우리 조카와 게임을 했을 때 내가 치트키로 내미는 카드다.

냉방이 되고 깨끗한 엄청나게 큰 마트도 있고, 게다가 그게 여러 개 있고, 무엇보다도 아이스커피를 파는 카페도 있었다. 택배는 안 오지만, 감자칩 하나를 사 먹으러 뙤약볕에 30분을 걸어야 했지만, 가끔은 30분 걷는 게 덥고 힘들어서 눈물도 났지만 대부분은 편리했다.

내가 6개월간 지내던 곳은 사랑스러운 독일인 가족이 지내는 수영장이 딸린 커다랗고 아름다운 저택의 방 한 칸이었는데, 거기서는 홈스테이라고 불렀다.

말라위 가족이 아닌 외국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라니? 상주하는 경비원이 문을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고, 하우스키퍼가 빨래나 청소를 해주는 이를테면 귀족의 삶이었다.

내가 지낸 것처럼 릴롱궤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현지인과는 분리된 구역에 커다란 담장을 치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낸다. 나는 처음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내고 내 빨래를 맡기는 것이 다소 미안했는데, 그들에게는 필요한 경제활동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다들 괘념치 말라하였다.

더불어 아프리카에 와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트립어드바이저에 소개된 식당들은 팬시 했다. 내가 올린 사진을 보고 친구들이 ‘아프리카 가있는 거 맞음?’하면서 의아해했다. 거의 외국인뿐인 고가의 식당에서 한 끼를 먹고 나면 이 나라 사람들 월급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고, 그 식당의 자본마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식당을 벗어나면 맨 발로 머리에 팔 것을 잔뜩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리어카에 넣고 파는 게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서 뭐를 파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내가 살던 집 옆옆 집에서도 아주 작은 아이들이 토마토를 대여섯 개 꺼내놓고 팔곤 했다.


차가 있었으면 더 편했겠지만, 종종 하이잭을 당한다는 얘기도 들었고, 우측 핸들이 두려워서 면허를 받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는 걸어 다녔고, 너무 멀면 한인분들의 도움을 구하거나 툭툭을 이용했는데, 자주 만난 툭툭 기사님이 말씀하시길 랜드마크가 없는 이 동네에서는 커다란 나무를 길을 찾는 이정표로 사용한다고 했다. 릴롱궤에서 들은 이야기 중 가장 낭만적인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니 한국으로 엽서를 보낼 때 우표를 샀더니 침을 묻혀서 붙여주셨던 것도 약간 낭만적이었다. 남자 둘이 길을 건널 때 손을 잡고 다니는 것도 신선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하얗고 큰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주는 사람들, 영어를 너무 잘하는 그들은 ‘하와유’라고 무조건 물어보는데 한 번은 ‘아임파인땡큐’하고 휙 지나간 적이 있다. 너무 놀란 얼굴로 따라와서 ‘what about me!!'하고 'and you?'를 하지 않은 나를 나무란다. 지금도 웃음이 빵 터진다. 길가에 핀 꽃나무에서 꽃을 따먹는 사람들,  리어카에 수박을 놓고 팔고 있는데, 멀리서 보기에 무슨 씨가 이렇게 많지? 싶어서 가까이 가보면 씨가 아니라 다 파리인 그런 낯선 광경들. 왼쪽으로 차오르는 달.

그리고 무엇보다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웅장한 빗소리, 그리고 2차적으로 바닥을 탕- 때리고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소리.

내 기억 속에 청각으로 강력히 각인되어 있는 것은 몇 개 안 되는데 그중에 1번이 바로 이 빗소리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2번은 파타고니아의 빙하가 떨어져 나올 때 지구가 쪼개지는 거 아닌가 싶었던 그 소리, 3번은 이과수 폭포의 악마의 목구멍으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다. 건기에는 화단에 물 주면 구속된다더니, 우기에는 정말 무섭게도 비가 왔었다.


복잡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 사랑스러운 땅의 사람들이 건강하게 삶을 영위했으면 했다. 나의 직업적, 영적 은인이신 선교사님께서는 아직도 말라위의 구강건강 향상을 위해 애쓰고 계시다. 나도 잠깐이나마 힘을 보탰으니 천국에 벽돌하나 얹은 걸까? 글을 쓰면서도 당장 저녁을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 나 하나 잘 살게끔 만드는 것도 너무나도 고역인 걸요? 하는 철없는 칭얼거림에서 잠시 벗어나본다. 적도 근처에서 느리게 자전하던 그 나라는 어떤 희망을 갖고 있을까?

지금 우리네 삶은 너무도 풍족하여 이 정도면 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앞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겪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지 아닌 도 모르지만 우리네 기준으로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 내 편협한 시각과 단편적인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직도 부끄럽다만 어쨌거나 생리대가 없어서 학교를 못 나가는 친구들은 없었으면 좋겠는 마음이고, 내 직업적인 관점에서는 치료 시기를 놓쳐 이가 몇 개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것도 예방할 수 있다면 더 좋겠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나 같은 사람이 넘쳐나서 오히려 공급과잉인데, 그쪽에 가면 지금은 아주 쓰임새 있게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이건 너무 쓰면서도 무서운 문장이다. 구업이라는 게 있으니 우선 질러본다. 변화는 두렵고 사람은 아주 아주 쉽게 옛날의 모습대로 돌아간다. 무관심의 관성은 좀 강력한 편이므로 자주 들쑤시지 않으면 다시금 내 앞만 보게 된다. 나의 겨자씨만 한 믿음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사용하시기를 바란다. 급히 마무리하려다 보니 내 의지가 아닌 신에게 기대를 걸고 끝내게 되었지만, 약간이라도 달라진 마음가짐은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하고 그간 미처 보지 못했던 문을 두드리게 할 수도 있으니, 나는 또 자족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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