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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리핵주먹 Apr 24. 2024

킬리만자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Be with hope  

무료한 어느 날, 멍하게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킬리만자로'라는 산을 처음 봤다. 조용필 노래 속에서 음산하고 나지막하게 읊조려지는 그 가사 속의 낯선 단어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


이렇게 살다 보면 단 몇 초 만에 시신경을 통과한 정보가 일생의 숙제처럼 남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입력과 저장이 단순한 뇌구조를 가진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티브이에서 보거나,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잠깐 스쳐간 정보들이 사라지질 않고, 어느 순간 반짝! 하고 튀어나와 통장을 갉아먹는 원흉 노릇을 하고 있다.


사실 이건 암흑의 터널을 지나던 고3때 이야기이다. 티브이를 본 이후, 언니에게 원하는 대학에 붙으면 선물로 킬리만자로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만큼이나 정보가 부족했던 언니는 쉽게 그러겠다고 했다. 재수 좋게 나는 붙긴 했지만, 언니는 입을 싹 닦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어딘가에 떨어질 비행기표마저 구하지 못하는 재정이 문제였을까, 갖은 노력을 해서 갈 만큼 그렇게 간절하지 않아서였을까 킬리만자로는 손에 닿지 못할 동경으로 남겨둔 채 잊고 살았다.


그렇게 딱 십 년이 흘렀다.

어쩌다 보니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던 나에게 3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올 해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에게 킬리만자로를 선물한다! 통 크게!


아프리카와 나는 인연이었던 걸까? 세상 수많은 것들과 그에 비해 턱없이 짧은 생에, 나에게 허락된 이런 특별한 경험을 우주의 계획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달리 뭐라고 부르겠어..라고 통장에게 항변한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쓰고 있는 '스와힐리어'를 쓰고

킬리만자로는 스와힐리어로 '빛나는 산'이라는 뜻이다. 검은 대륙의 하얗게 빛나는 산이라니.

나무 위키가 전해주는 간단한 정보가 나에게는 시처럼 느껴진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4박 5일 동안 이 가사를 몸소 체험한다. 자고 나면 나는 2000m에서 4000m까지 올라와있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면서도 퉁퉁 붓고 무거워진 육신을 어쩌지 못해 초라해진다.


7 대륙 최고봉들 중에 평범한 인간이 노력을 다해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꼭대기, 킬리만자로의 우후루피크(Uhuru peak)까지 5895M를 올라가는 동안 6가지 Climate zone을 통과한다고 한다.

6개까지는 잘 모르겠고, '열대우림-사바나-사막-빙하' 맵을 바꿔가며 게임을 하게 된다.

걷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감각이 무뎌져도 나무의 키가 점점 줄어들다가 사라지는 건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작아지는 나무의 키만큼, 하늘이 더 잘 보인다.


5일 동안 우리는 대충 세수만 하고, 머리를 감는 것이나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은 인터넷 연결과 함께 저 낮은 동네 속세에 버리고 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희한하게 생긴 식물을 보면 자세히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산장에 도착하면 등산화를 말리고, 커피를 마시고,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미리 다운로드한 이북을 보다가 잠이 든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지상이 구름 아래 겸손하게 깔리는 것이 보이고, 짧은 일정이지만 잠시 동안 출가한 스님의 마음을 느껴본다. 심신이 단출해지니 행복해졌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공항에서 같이 등산한 선배 언니를 기다리던 나에게 다른 팀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다.

내 피지컬은 고산병에 걸릴 리가 없다고....

                                                                                                                                                                     

하쿠나=There is no

마타타=Worries


그의 말인즉슨, 키가 크고 근육이 많은 서양인 남자 정도는 되어야 몸에서 쓰는 산소가 많고,

그 정도 되어야 산소가 부족해져서 병이 난다나? 체력이 아니라 고산병 때문에 꼭대기를 못 간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서, 비아그라까지 챙겨 온 나였지만, 그의 말에 엄청나게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summit에 오르는 밤에 손 발이 붓고, 얼굴이 터질 것 같게 생겨지긴 했지만 이런 못생김 병 말고는 어떤 두통이나 구토 증상도 없었고, 심지어 밥도 맛있게 잘 먹었다.


4박 5일 일정 중에서 셋째 날까지는 조금 힘들지만, 평균 이상의 체력을 가진 나와, 평균 체력을 가진 선배 언니도 기분 좋은 땀을 흘리며 오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 할만한데? 나중에 가족들이랑 또 와야겠다! 하던 나의 마음은 정상을 오르는 밤에 대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이런 경험은 희소성을 위해서 once in a lifetime이어야만 해.'


3번째 날 호롬보헛에서 키보헛까지 5시간을 걸어서 4720m까지 오르고, 잠깐 저녁잠을 잔 후에 밤 12시에 야간산행을 재개한다. 가장 짧은 시간에 써밋에 오르는 코카콜라 루트(마랑구 루트)의 유일한 단점이다. 그래서 이때 성공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실제로 키보 산장에서 포기한 자들을 여럿 보았다.  

진입장벽이 높은 것들은 가치가 있다.


스키바지에 스키 장갑에, 온갖 방한 장비를 다 장착하고 싸대기를 갈기는 눈발을 마주하며, 1000m를 오른다. 키보헛에서 우후루피크까지 7시간이 내 서른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일축해서 써버리는 게 억울하다. 사실, 12시에 출발해서 우후루피크에서 일출을 보는 코스인데, 체력이 달린 나는 중간에 일출을 보게 되었고, 일출 전까지는 헤드랜턴에 의지해서 앞사람 발만 보고 걷게 된다. 미리 저장해 온 58곡의 재생이 끝날 때쯤 나의 뇌도 함께 꺼져버렸다. 좌뇌를 off 시키면, 평화로운 우뇌의 영역으로 들어간댔는데, 나는 그냥 다 꺼져버렸다. '킬리만자로 간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는데...' 하는 구업만이 남아있을 뿐.


왜 어째서 peak간판을 저 멀리에 가져다 놓은 걸까? 표지판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좀비처럼 '으어어어'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무겁게 내디뎠다.


가이드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일으키고, 나는 다시 주저앉고, 일어나지고를 반복하며

 (never surrender!) 결국에 peak 표지판 앞에 섰다.


MOUNT KILIMANJARO 'congratulations, you are now at UHURU PEAK, TANZANIA, 5895m'

AFRIRCA'S HIGHTEST POINT


이 판때기를 만나러 영원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대자연 앞에 한없이 나약한 나를 속죄하고, 이를 계기로 새 인생을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녹고 있는 빙하를 보며 꿈을 이뤘다는 숭고한 고양감으로 가득 차서,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어야 했다. 죽은 고기를 먹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굶어 죽고 얼어 죽는 한 마리 표범처럼, 득도했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함축한 눈물 한 방울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아싸 도착했다!'

빙하가 진짜 있네, 밑에 구름이 있네, 여기 꼭대기 간판이 있네..


영혼을 팔아서 이 높은 곳에 올라와있는 걸까? 그래서 닳은 도가니처럼 영혼도 닳을 대로 닳아서 아무 느낌이 없는 걸까? 꼭대기의 온도에 얼어버린 선크림처럼 뇌도 얼어버렸나, 심란했다.


어쨌든, 이런저런 분석을 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인증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잔인한 일정..


내리막길을 생 눈으로 보니 왜 이 길이 야간산행이었어야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가이드의 말로는, 낮에는 사람들이 이 코스를 눈으로 보면 겁이 나서 안 간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갈지'자로 생긴 엄청난 경사였다. 내 앞에 있는 게 별인지, 누군가의 헤드랜턴인지 헷갈렸는데 눈이 삔 게 아니었다. 내려가는 길도 수월하진 않았지만, 커다란 과업을 이뤄 낸 사람이 되어 가볍게, 미련 없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킬리만자로의 일출은 내 인생의 최고의 일출이어야 했고, 이 이야기는 내 일생일대의 무용담으로 남아야 했는데

나는 그저 다녀왔다.


허탈한 웃음이 난다.


나의 강인한 체력과 고산 적응에 감탄했으며, 무사히 다녀왔음에 감사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잔잔했던 것이다.


소박한 계집애.


내 안에 표범이 없었지만, 산장 문 밖으로 펼쳐지는 별바다는 여행을 많이 다녀본 자의 오만하고도 덤덤한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프리카 사람들 특유의 여유로움과 명랑함은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서, 조급한 내 인생에 '폴레폴레'(=천천히)를 만트라처럼 외치게 해 준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에 마음을 조금 얹어서 오감의 기억 속에 남겨놓고 싶다.

아무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싶다.

경황없는 세상의 삶과 평행을 이루며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디에선가

항상 느끼면서 살고 싶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그래도 오래 지나고 이때의 사진을 보면 감정이 동한다. 억지로 울면, 조금 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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