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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ye Oct 02. 2020

어느 초보 프리워커의 일과 일상

내게 지속 가능한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정규 직장에서 퇴사한 지 벌써 9개월을 꽉 채웠다. 퇴사하고 처음엔 6개월은 그냥 좀 쉬면서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했고, 그 뒤로는 다시 직장을 구할 생각이었다. 6개월째 되던 무렵 반려견이 생겼다(유기견을 임보 하다, 어쩌다 입양을 하게 되었다). 아직 마음이 불안정한 개를 두고 바로 다시 주 40시간 근무하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신경 쓰였다. 우선 하반기가 끝날 때 까지는 최대한 반려견과 함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쫌쫌따리 일들을 모아 생계를 이어봐야지.. 막연히 다짐했고, 어찌어찌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9월 기준 내가 하는 노동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9월부터 연말까지 한 회사와 주 16시간 노동을 기본으로 계약을 맺고 출근하고 있다(재택을 병행한다). 교육프로그램 사업을 기획/운영하는 일인데, 이것이 연말까지 거의 메인 소득이 되었다.
2) 가끔 비건 카페에(주 1회 혹은 격주 1회 정도) 출근해서 커피만드는 일을 하고,
3) 유튜브 콘텐츠를 기획하고 대본을 쓰고 레시피를 정리해 출연한 뒤 편당 페이를 받는다(내 채널은 아님).
4) 유튜브를 통해 지역 기반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해달라는 연락을 받아 그것도 이번 달부터 11월까지 하게 되었다.
5) 그 외에 가끔씩 동네 친구들에게 두거트(두유요거트)를 배달하고, 동네의 제로 웨이스트 실험 커뮤니티에서 아이디어를 보태거나 퍼실리테이터로 일하기도 한다.


이것저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을 다 합하니 다행히도 작년에 받았던 월급에 좀 못 미치게 비슷해졌다(작년에 받은 월급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 저번 달엔 마켓에 참여해 얻은 수입과 팝업 식당 수입, 친구와 공모사업에 낸 아주 짧은 영화가 다행히도 당선되어서 받은 지원금, 예전에 만든 굿즈 수입 정산액, 바리스타 일로 돈을 벌었다. 저번 달 소득은 이번 달 보단 훨씬 적었기 때문에 다음 달엔 뭘로 돈을 벌어야 하나, 얼른 직장을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이 많았다.


올해 노동을 제공해 단돈 10만 원이라도 벌었던 일들을 써보니 총 15개 정도다. 요리 노동도 있고 글쓰기 노동도있고 남의 강아지 돌봄 노동, 기획 노동, 친환경 페인트칠 노동, 퍼실리테이팅 노동, 제품 판매 노동, 프로그램 운영 노동 등 종류도 다양하다. 기술과 전문성이 없는 프리랜서는 어떻게 프리랜서가 되나. 돈이 되는 건 다하면 된다(그런데 이런 것도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프로 알바꾼이 아닐까..?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일을 줄 사람들과 여러 지원금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신청할 수 있는 기술도 갖추면 금상첨화다. 정말 다행히도 연말까지는 어찌어찌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불안정하고, 경력이 될지도 모르겠고, ‘내가 이걸 하는 게 맞나’ 싶으면서도 하고 있는 초보 프리워커 생활.. 예측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정말 크지만, 그에 비해 장점들도 너무 나와 잘 맞아서 이걸 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끊을 수 없는 장점은 예컨대 이런 것 들이다.



내 시간의 주도권을 내가 갖는다


나는 요즘 8시 반~9시 반 사이에 일어난다. 동거인이 늦게 일어난 날엔 강아지 아침 산책을 내가 시키고, 동거인이 출근 전에 개를 산책시키는 날엔 난 요가를 하거나 달리기를 한다. 운동하고는 씻고 과일과 두거트를 먹고 오전 11시까지 자유시간을 가진다(오피스로 출근하는 날에는 보통 10시 반에 출발해서 11시까지 간다). 보통 좀 더 자거나 청소를 하거나 다복이랑 놀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11시부턴 업무를 한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들을 쓰고(회사와 일하는 날에는 오늘 할 일들을 팀장에게 이야기하고), 일을 하고, 만들어둔 점심을 데워먹고, 다복이 점심 산책을 시킨다. 보통 5~6시엔 일을 마치고, 저녁을 한가득 만들어두고(다음 날도 먹을 수 있게), 저녁을 먹고, 다복이 저녁 산책을 시키고, 넷플릭스를 보거나 블로그를 쓰거나 일기를 쓰다가 잔다. 카페 출근일이나 미팅이 있을 땐 조금씩 바뀌지만 대체로 이렇다. 물론 시간관리에 망하는 날도 있고, 그럴 때의 자괴감은 회사에 다닐 때 보다 더 크다(자율성이 있는데도 이렇게 밖에 못살다니..라는 죄책감 때문에).


작년엔 아침 8시 40분에 집에서 나와 저녁 8시 반이 좀 넘어 집에 들어왔다(10시~7시 근무). 출퇴근 시간이 왕복 2시간 조금 넘게 걸렸기 때문에, 출퇴근에만 하루 에너지의 40% 이상을 썼다. 아침잠이 많기 때문에 아침엔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 대충 두유 같은 걸 입에 물고 눈을 감은 채 출근하고, 퇴근하면 밥을 먹기 애매한 시간이 되어 비빔면 같은걸 끓여먹고 누워서 휴대폰만 보다 잤다. 설거지는 몰아서 했고 청소는 격주에 한 번 했다. 올해는 출퇴근 시간이 거의 없어지니까 내 몸과 반려견을 돌볼 시간이 충분하다. 내 몸의 에너지가 충분하니까 일할 때도 집중력이 높다. 하루 8시간 이하로 일하는 재택 노동자로서 느끼는 점은, 하루 5~6시간만 일해도 8시간 일했던 양이랑 거의 비슷하게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어차피 인간의 집중력은 한계가 있고, 재택으로 일하면 노동시간을 채웠다는 안정감보다 오늘 해야 하는 일의 체크리스트를 다 지웠는지를 더 중점으로 보기 때문에 빨리 끝내려고 집중력을 뽜라락 쓰게 된다. 중간중간 너무 졸리면 커피로 그걸 억누르는 게 아니라 10분 정도 자고 다시 할 수 있다. 커피 없이 일을 하는 게 가능하다니.



내 식생활 지향점을 보존할 수 있는 일상


식사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나는 동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을 웬만하면 먹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윤리적인 문제도 있지만 일단 고기와 우유는 소화를 잘 못 시키고, 먹으면 속이 안 좋고 내내 피곤해진다. 가끔은 먹게 될 때도 있지만, 그 가끔의 상황을 최대한 적게 만들고 싶다. 회사에 다닐 땐 그게 쉽지 않았다. 매일 도시락을 싸서 가기엔 체력이 녹록지 않았고, 비건 옵션 식당을 찾아가기엔 멀고 비쌌다. 특히 다른 사람과 함께 먹을 땐 서로 조심스러워지는 분위기가 싫어서 아무거나 먹을 때도 많았다. 조금씩 나와 타협하며 먹다 보니 언젠가부터 채식 결심이 흐지부지 됐다. 회사에서도 그렇지만 집에서도 그랬다. 요리하기 애매한 시간에 집에 와서, 최대한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계란, 인스턴트였기 때문에 고기는 안 먹어도 그런 것들은 자주 먹었다. 채식 지향 결심을 한지는 3년이 되어가지만 본격적으로 제대로 채식을 하게 된 건 퇴사를 한 이후에나 가능했다. 요즘의 식사는 95% 정도는 완전 채식(비건)으로 이뤄지고 있다. 간단하게라도 해먹을 시간이 충분하고, 주로 혼자 챙겨 먹으니 식사 결정권이 오롯이 내게 있는 점이 너무 좋다.



돈에 대한 불안 통제력이 높아졌다


회사 다닐 때보다 수입이 줄었고 이마저도 지속성이 없어 아주 불안했는데, 지출을 최대한 통제하는 방식으로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줄였다. 퇴사하고는 한 달에 90~100만 원 정도를 쓰고 있고, 그래서 매달 25일 나에게 월급을 주듯 100만 원을 소비 통장에 쏜다. 여기서 고정비(공동 생활비, 전세대출이자, 보험/통신비, 교통비)를 고정비 통장에 이체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세이프 박스에 넣어둔 후 ⅕ 한 금액만큼 나에게 1주일씩 용돈을 준다. 용돈은 남으면 저축하고 모자라면 비상금 통장에서 조금씩 더 빼오는데, 대체로 딱 맞게 쓴다. 수입은 모두 수입용 통장에 모으고, 블로그 수입만 따로 반려견 통장에 저축한다(정말 소소한 수입을 주는.. 귀엽고 소중한 블로그.. 내년엔 조금 더 벌어보는 것이 목표이다). 이렇게 하면 월 수입이 100만 원만 넘으면 적자는 아니기 때문에 ‘한 달 벌어 한 달 나를 먹여 살렸다’는 적당한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


적자가 안나는 가장 큰 이유는 소비가 줄었기 때문이다(아직까진 책임질 부양가족이 나와 다복이 정도라는 점도 큰 이유다..). 보통 회사 다닐 때 교통비가 월 10만 원 정도가 들었는데, 올해는 월에 2만 원도 안 나온다. 밥을 해 먹으니까 식비가 거의 안 든다(식재료는 공동 생활비로 산다). 사람을 잘 안 만나니까 옷에 신경을 안 써도 된다(원래도 거의 안 썼지만..). 동네 이웃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자주 안 하니까 요즘 유행하는 게 뭔지, 어떤 책이 재밌는지, 요런 이야기를 들을 새가 거의 없다. 한 발 뒤쳐질까 싶어서 하던 소비와 사교비가 눈에 띄게 줄었고, 유행하는 책보다는 사두고 안 읽었던 책들 위주로 읽는다.


작년과 비슷한 수준의 월급을 버는 것에 안주할게 아니라 회사에서 성과를 내며 커리어를 쌓고, 연봉협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얼른 소득의 전성기를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생활비만 신경 쓸게 아니라 미래의 지출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문득문득 들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한도 끝도 없어진다. ‘주 40시간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고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네?’라는 자기 확신을 어느 정도 얻은 것, 회사 밖이라는 선택지를 내가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올해의 소득이 아닐까 싶다(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일하는 자아를 분산시킬 수 있는 점


사실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겐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데, 나는 나의 일하는 자아가 1가지에 종속되는 것을 조금 두려워하는 편이다. 회사에 다닐 때, ‘(회사명)의 매니저 OOO’로 정체성이 귀속되는 게 불안할 때가 많았다. 회사에 대한 애사심, 일에 대한 재미가 충만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떤 힘든 점을 감내하며 다녔기 때문에, 혹은 회사 내에서 부족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많았기 때문에, ‘00 회사에 소속된 나’를 내 메인 정체성으로 삼을 때면 회사나 회사 안에서의 나의 부족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회사원으로서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나의 한 달이 ‘회사 생활'로만 구성될 때 특히 그 달은 불행했다. 그나마 사이드 프로젝트로 양다리를 거친 달이면, 그 달의 회사생활이 아주 별로였어도 나의 노동하는 자아가 다른 갈래로도 있었다는 점에서 뭔가 견딜만했고, 일에 대해 조금 거리를 두고 여유 있게 대하기가 가능해졌다.


회사뿐만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항상 그래 왔다. 세계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나는 주변에서 나를 ‘여행하던 사람'으로만 보는 것이 불편했고(내게서 들으려는 대화 주제가 대체로 그리로 흘렀다), 채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채식주의자'로만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나를 어떤 정체성 안에 끼워 넣는 방향보다 내 안에 여러 모습을 흐르게 두고 싶었다. 나 스스로도 나를 그렇게 대하려면 여러 개 정체성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기회를 늘리는 게 경험상 좋았다. 어떤 때는 채식요리를 하는 사람으로, 어떤 때는 프로그램 운영자로, 어떤 때는 제품 파는 사람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아직까지의 나에겐 좀 더 마음 편한 일이다.


앞으로의 내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퇴사를 한 직후엔 꽤나 소진되어있던 상태여서 회사를 다시 다니기가 너무 싫었다. 일하지 않고 먹고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파이어족(빠르게 돈을 모으거나 돈이 계속 벌리는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이르게 은퇴하는 사람들)에 대한 유튜브나 책도 열심히 읽었다. 요즘 본격 노동을 하며 새롭게 느끼는 점은, 나는 일을 싫어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에 내가 처리해야 하는 테스크가 있고 그걸 지워나가며 일하기를 좋아하고, 성취감을 느낀다. 어떤 일을 해나가는데 세부 기획과 우선순위를 세우고 구현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고, 결과물을 함께 보는 일을 좋아한다. 손과 몸을 써서 하는 일도 좋아한다. 주문을 받고, 뭔가를 만들어서 손님에게 전달하고,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피드백이 올 때 쾌감이 있다.


다만 나는 일상을 잘 꾸려나가는 것 또한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내가 유지하고 싶은 일상은 1) 내가 책임지기로 한 반려견과 하루 1-2번 산책할 수 있는 일상 2) 비건 지향을 유지할 수 있는 일상 3) 내 안의 다양한 정체성으로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일상이다. 일반적으로 회사에 다니며 이걸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훨씬 부지런하거나, 재택근무가 유연하거나, 노동시간 자체가 적거나, 출퇴근 시간이 짧아야 하고, 근무 시간 외 다른 노동을 하는 것에 대해 회사가 관대해야 한다. 결국 나는 일보단 회사원으로서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조건들이 슬펐던 것이다. 요즘의 나는 내년의 내 노동 형태가 어찌 될지 궁금하다. 다시 회사에 다니는 것도 열어두고 있고(아마도 90% 확률로..), 여건이 된다면 지금처럼 프리워커로도 지내보고 싶다. 다만 좀 더 장기적인 시야로 일하는게 가능하다면..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의 방향보다는 노동의 조건이 더 구체화된 것이 좀 슬프기도 하다. 예전엔 일로 이뤄나가고 싶은 사회적 가치가 컸고,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도 꽤나 드글드글 했는데 요즘엔 그런 게 많이 소멸된 느낌이다. 대체로 평온한 요즘 나의 전반적인 기분은 50점에서 85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예전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 되었지만 절망과 희열이 없는 마음이 조금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음이 살짝 나이 든 느낌이랄까..


과연 내 내년 노동, 내후년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아직 너무 모호하고,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뭐.. 어떻게든 밥해먹고살겠지. 건투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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