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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Mar 07. 2021

매일을 여는 의식

아침, 눈 뜨면 침대를 정리하다.

  인생 중 중요한 시작과 끝엔 식(式)이 있다. 입학식, 졸업식, 결혼식과 장례식까지.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특정 의식을 통해 준비 태세를 갖추고, 과정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듯하기도 하다.


  마치 통과의례처럼 내게는 매일 아침을 여는 ‘의식’이 있다. 바로 침대 정리. 눈 뜨자마자 침실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가습기의 물을 빼서 햇볕에 말린다. 살균제를 들어 베개에 두어 번 뿌려 정돈하고, 이불을 탁탁 털어 밤새 쌓인 먼지를 떤다. 이불을 베개 위에 네모지게 접고, 룸 스프레이를 두어 번 뿌리면 끝. 출근 준비를 마치면 다시 안방으로 돌아와서 열었던 창문을 닫고 집을 나선다.



  침대 정리를 습관화하게 된 건 몇 년 전 아침 소모임에서였다. 예전 회사에서는 아침에 50분 정도 책을 읽고 묵상한 내용을 나누던 시간이 있었는데, 당시 소모임에 함께 있던 후배가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책을 소재로 나눔을 했다. “거장들의 습관을 담은 책인데, 아침에 침대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바꿀 수 있다고 하더라”며 책을 소개했는데, 이야기를 들을 당시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루를 바꾸기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지 않은가. 그런데 너무도 작은 일이라는 충격 때문인지, 하루 종일 머릿속에 그 말이 남았고, 별 볼일 아닌 일인데, 밑져야 본전이니 나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에 입사 3년 차 정도였던 나는 말 그대로 일에 파묻혀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생활의 중심이 ‘일’이어서 집에서 여유 시간을 갖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혼자 살던 8평 남짓한 오피스텔을 돌볼 수 있는 날은 오직 주말, 이틀뿐이라 여겼고, 평일엔 집안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책상엔 읽다 만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침대는 늘 일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생활에 오직 ‘일’뿐이어야 최고의 효율로 일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에 지배되던 날들이었다.


  소모임 다음 날 아침, 처음으로 바쁜 출근길에 이불 정리를 시도해 봤다. 베개를 바르게 놓고, 이불을 반듯하게 펴는 일. 그때 처음으로 이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을 바쁘단 핑계로 미뤄두고 있었구나 하는 황당함 같은 게 느껴졌다. 후배가 말해준 책처럼 침대 정리 때문에 그 하루가 달라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처음으로 일상의 사소한 일을 챙기는 게 결코 우선순위를 뒤바꿀 만큼 힘들거나, 버거운 게 아니라는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아침 침대 정리를 아침을 여는 의식으로 삼는다. 어제의 시간은 이미 과거가 되었다는 인정, 내게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잘 살겠다는 다짐, 바쁘고 정신이 없어도 내 일상을 가꾸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결심. 뒤섞인 감정으로 침대 정리를 하고 나야 비로소 하루의 시작을 실감하게 된다. 침대 정리는 퇴근 후 자기 전에 진가를 발휘한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침실로 들어왔을 때 반듯하게 정리돼 있는 침구와 아침에 뿌린 블랙베리의 잔향이 남아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며 위로해주는 듯한 기분. 인생의 통과의례처럼 때때로 형식이 내용보다 더 중요한 때가 있다. 이제는 너무도 한 몸 같은 습관이 돼, 매일 하루를 바꿔주고 있는지 감흥을 주진 않지만, 이 작은 결심 하나가 내 일상의 위대한 습관의 여정을 시작하게 해 준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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