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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Mar 31. 2022

창작자를 위한 일본드라마 두 편.

<콩트가 시작된다>와 <중쇄를 찍자!>

"미국 메디컬 드라마는 의사들이 환자를 고치고, 일본 메디컬 드라마는 의사들이 교훈을 주고, 한국 메디컬 드라마는 의사들이 연애를 한다."는 오래된 인터넷 농담이 있다. 한국 드라마의 경우는 최근 경향이 많이 달라지면서 해당사항이 줄어든 것 같긴 하지만, 저 농담을 바꿔 말하면 각각의 나라들이 저 연출을, 적어도 저 요소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꾸 엇갈리다가 끝내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을 그리는 실력은 한국 드라마가 단연 최고다. 내가 한국인이라 더 몰입하게 되는 것도 있겠지만 보면서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 아 드라마에서 연애 좀 하면 어때. 잘하는 거 좀 계속하게 내버려 두자.


그러니까 일본 드라마는 정말 교훈을 잘 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 특유의 다소 과장된 표현들이 종종 과잉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게임 <파이널 판타지> 어느 시리즈가 그렇게 명작이라길래 플레이했다가, 모든 등장인물들이 틈만 나면 "지켜줄게!"를 너무 비장하게 외쳐대는 통에 도대체 뭘 그렇게 지킨다는 건지 조금 피곤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팬들 사이에서도 '마모루(まも-る: 지키다)판타지'가 별명으로 불렸더라.

하지만 이런 비장함도 그만큼 힘이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정착했을 거다. 확실히 한국에서는 점점 더 '심드렁한' 태도가 주류 정서로 자리 잡아가는 와중에, 힘차게 소리치고 온 힘을 다해 말하는 일본 드라마를 보면 절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래, 아무래도 삶은 교훈과 비장함도 좀 있어야 반짝반짝 빛나는 법이다.


그 교훈적인 일본 드라마 중에서도 방송을 만들어 대중 앞에 내어놓는 일로 먹고살고, 틈틈이 책도 써내는 사람으로서 가슴 깊이 교훈과 감동을 얻었던 드라마 두 편이 있다. 정말 뜨겁게 반짝인다.

<콩트가 시작된다>. 닛폰테레비. 2021.


한국의 예능인, 일본의 게닌(芸人)

일본의 개그맨, 코미디언은 최근의 한국과는 위상이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도 <개그콘서트>가 한창 뜨거울 때 공개 코미디에 대한 인재양성 비슷한 느낌으로 대학로 소극장에서 꾸준히 코미디 공연들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그 명맥이 가늘게 이어져오고 있지만, 일본 곳곳에서 활약하는 다양한 개그맨들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사실 일본은 개그맨뿐 아니라 밴드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돌'도 소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가 있는 곳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물론 시장이 크다고 생활이 더 낫다는 건 아니다. 여기도 인기를 얻지 못하면 힘들긴 매한가지다.


흔히 '인기스타'하면 화려한 배우나 아이돌을 떠올릴 때가 많은데, 한국에서도 모든 연령이 다 알고 두루 사랑받는 연예인은 단연 '유재석'인 것처럼 어느 나라나 개그맨, MC로 분류되는 예능인들이 연예계를 통틀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정상'은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가장 넓은 인지도와 함께 납세액으로 증명되는 '몸값'이 이를 증명해준다.


한국은 정통 코미디 장르가 주류 미디어에서 거의 사라져 가는 중이라 코미디언이란 말도 점점 쓰지 않고 통틀어 '예능인'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 엄밀히 얘기하면 '예능인'은 배우나 뮤지션처럼 예술적인 기예를 보여주는 모든 이들을 이르는 말이긴 하다. 한국에서 부르는 개그맨, 코미디언, 예능인을 거의 통합하는 개념으로 일본에서는 '게닌(芸人)'이란 호칭을 쓴다. 호칭에 구분이 없는 것처럼 한국에서 '예능인'들이 주로 맡는 MC 역할부터 '개그맨'으로서의 정통 코미디 무대까지 '게닌'은 종횡무진 활동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급 MC들도 대부분 공채 코미디언으로 시작해 공개 코미디 무대에 올랐던 '개그맨'들이다.) 일본은 소위 '만담'으로 일컬어지는 정통 코미디부터 시작해서 게닌들이 활동하는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한국으로 따지면 '유재석'이나 '강호동'에 해당하는 슈퍼스타 게닌의 숫자도 한국에 비해 훨씬 많은 편이다. 그만큼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지망생들의 숫자도 꾸준하다.

'콩트' Conte

아마 '콩트'라는 말을 써본 사람이 있는 사람이라면 [꽁트]라는 발음이 더 익숙할 것이다. 실은 이쪽이 더 정확한 발음일 수도 있는 게,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분량의 소설'을 이르는 프랑스 단어다. 알파벳 문화권의 많은 나라에서 이 단어를 번역 없이 그냥 쓰고 있는데, 한국어의 공식 표기법은 '콩트'라서 드라마의 제목도 저렇게 번역이 되었다.

'아주 짧은 분량'의 소설만 따진다면 '엽편'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콩트'에는 짧은 분량과 더불어 강렬한 풍자나 유머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장르적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코미디 장르와 이어질 운명인 셈이다. 때문에 콩트는 짧은 길이의 대본으로 구성되는 코미디 단막극을 이르는 말로도 정착했다. 한국어로는 종종 '촌극'이란 단어와 혼용되어 쓰인다. '마디 촌'(寸)자를 쓰는 촌극도 단어 자체로는 '짧은 연극'이란 뜻이지만 '웃지 못할 촌극'이란 관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 '유머'를 기본으로 포함하고 있다. '콩트'랑 온전히 똑같은 용례다.


'콩트'란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실제로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코미디를 포함한 짧은 연극'이라고 하면 자연히 <개그콘서트>가 떠오르지 않는가. 조악한 그림 배경판을 세워놓고 코미디언들이 정극에 가까운 희극 연기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바로 전형적인 콩트의 모습이다. 가장 유명한 코너는 역시나 '봉숭아학당'일 것이다.

물론 <개콘>은 1999년에 시작해 2020년 종영까지 장장 20년을 장수한 프로그램인 만큼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시도를 거듭해왔고,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콩트가 뒤섞인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코미디에서 전형적인 콩트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일 텐데, '봉숭아학당'도 실은 이 시기 <한바탕 웃음으로>에서 시작한 것을 <개그콘서트>가 리메이크를 거쳐 다시 간판 코너로 삼은 거니까. 심지어 <개콘>의 '봉숭아학당'이 훨씬 오래 방영되었음에도 여전히 '봉숭아학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창훈의 맹구, 오재미의 오서방을 먼저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오리지널 '봉숭아학당'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콩트의 전성기였으니까.


많은 한국의 방송들이 그러했듯, 이 '봉숭아학당'도 앞서 일본에서 유행했던 교실 코미디의 변형이다. '표절'이라고 이야기하기엔 거대한 하나의 장르다 보니 애매한 지점이 있지만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할 수야. <나 혼자 산다> 이후의 관찰예능들을 표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사실 한국의 방송산업은 일본의 거대한 영향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시절 '봉숭아학당'이야 말해 무엇하랴. 방송업계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수많은 일본어들에 대해 다루면서 이미 그 영향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kwsungmin/32)


어쨌든,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콩트'가 중요한 소재인 걸 넘어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콩트'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굳이굳이 이런 긴 설명을 붙여 보았다.

<콩트가 시작된다>는 젊은 3인조 게닌팀 '맥베스'의 청춘 드라마다. 고등학교 때 축제에서 우연히 콩트 만자이 공연을 하고 뭔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낀 주인공은, 친구 둘과 함께 대학도 진학하지 않은 채 게닌의 길에 오른다. 그걸로 먹고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주변에서는 당연히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그에 화답하듯 세 사람은 "딱 10년만 해보고 그때까지도 성공 못했으면 미련 없이 해산하자."라는 약속을 내건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시작은 바로 이 10년이 한 달 남은 시점부터다. 당연히 성공은 못했고, 기다리는 것은 약속한 해산뿐. 벌써 흥미가 생기는 시작 아닌가. 나만 그런가. 10년을 버틴 것도 대단한데, 결국 유의미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뱉은 말을 실천해야 하는 이 시점의 마음이 어떨지 내 가슴이 다 조여 온다. 아 이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을 자꾸 좋아해서 내가 히트 PD가 못 되나 보다.


옛날 느낌의 드라마라면 보통 이 한 달 안에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지고, 끝내 "우린 틀리지 않았어"라며 벅찬 감동과 인정의 순간을 맞이하겠지만, 요즘 트렌드는 그렇지가 않다. '브레이브 걸스'의 감동적인 역주행 신화는 그런 일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신화'인 거다. 치열한 활동 기간 동안 끝끝내 그런 유의미한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연예계의 작은 역사로 조용히 해산하는 팀이 훨씬 더 많다. 많은 픽션들이 그토록 벅찬 신화의 순간을 그리지만, 우리 삶은 대부분 이렇게 조용하고 별 볼 일 없는 실패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벅찬 신화'에서 받던 감동에서 허망함을 느낄 때, 끝끝내 실패로 끝나는 이런 드라마에서 조용하지만 진실된 위로를 얻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하루토는 결국 "우린 틀리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끝을 실패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조금 망설여진다. 어떻게 그런 결말에 이르는지는 스포니까 직접 드라마를 보시는 게 낫겠다.


'만자이' 漫才

다만 만자이(漫才)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 드라마의 형식은 독특하다. 처음에 1편을 틀고서 한동안, 진짜 콩트만 보여주는 시리즈인 줄 알았다. ‘아 넷플릭스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적극적으로 수입해왔으니까, 왓챠는 일본 콩트 코미디를 공급하려나보다’라고 잠시 생각했을 정도로. 드라마는 매회 ‘맥베스’의 콩트 영상으로 시작하는데, 이게 드라마 속 콩트라는 생각이 안 들만큼 본격적이다. 드라마를 틀었는데 다짜고짜 첫 화면부터 <개그콘서트>가 나온다고 상상해보면 내 당황함이 이해가 될 거다. 영상 속 ‘맥베스’ 멤버들의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화질이나 앵글까지 무심하게 찍힌 것이 정말 완벽한 콩트 영상의 재현이다.

콩트로 시작한 드라마는, 콩트 속에 등장하는 내용이 실은 콩트 밖 현실 속 사람들의 삶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극 중에서 그 콩트 대본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 하루토이기 때문인데, 하루토가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의문을 갖거나 깨달은 것들이 콩트에 반영이 되고 그 콩트 무대는 다시 삶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가 된다. 그러니까 매 회 콩트 장면으로 시작해서, 이 콩트와 연관된 드라마가 한 회 동안 펼쳐지고, 끝날 때는 다시 콩트 장면으로 돌아오는 구조가 반복된다. 이런저런 사연들을 알고 나서 마지막에 다시 보는 콩트는 분명 처음과는 다른 느낌. 완결성 있는 형식미가 주는 감동이 있다.


한국의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가 제한된 글자 안에서 형식미를 갖고 놀며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장르이듯, 일본의 전통 코미디도 이렇게 약속된 형식미 안에서 즐기는 경향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만자이'이며,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콩트도 큰 의미로는 '콩트 만자이'로 불리는 '만자이'의 한 갈래다. 만자이는 종종 ‘만담’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대화를 통해 우스갯소리를 이끌어내는 것을 ‘만담’이라고 한다면 이는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나 공히 발견할 수 있는 반면 일본의 ‘만자이’는 일본만의 고유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마치 <콩트가 시작된다>가 드라마 끝까지 일관된 형식을 고수하는 것처럼.


만자이는 보통 2인 1조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각각 보케(惚け)와 츳코미(突っ込み)로 불리는데, 보케는 주로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하는 바보 역할이고, 츳코미는 보케의 이러한 엉뚱한 행동에 화를 내며 호통 치는 똑똑하고 상식적인 캐릭터다. '봉숭아학당'에서 출연자들을 퇴장시킬 때 뒤통수를 가볍게 툭툭 치며 "들어가!" 하는 선생님을 떠올리면 쉽지 않을까.

최근에는 전통적인 2인 1조에서 벗어나 ‘맥베스’처럼 3인조 혹은 그 이상의 인원으로 꾸려지는 경우도 많은데, 그 경우도 대부분 츳코미 한 사람에 보케가 늘어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맥베스’에서도 츳코미를 맡는 주인공 하루토만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고, 보케를 맡는 나머지 두 친구, 쥰페이와 슌타는 ‘헤헤’거리는 순한 얼굴을 주로 하고 있다.

사실 이 구조는 비단 만자이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일본문화 전반에 상당히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역학관계다. <콩트가 시작된다>에서도 주인공 세 사람 중 가장 똑똑해 보이는 하루토를 보고 가게 점원들이 “츳코미가 주로 혼자 오지?”라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적인 캐릭터인 셈이다.

만자이를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바보 같은 말을 하는 등장인물을 향해 주변 인물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치는 장면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데, 이 버럭! 하는 호통이 일본말로 오도시(おどし)이며 방송 업계에서 '가장 웃긴 부분', '클라이맥스'라는 뜻의 은어로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는 앞서 링크한 '예능 제작 은어' 관련 포스팅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하나의 문법에 가까운 이런 연출도 결국 만자이의 츳코미에서 기원했으며, 보면 알 수 있듯이 츳코미보다는 보케가 늘어나는 경향을 띤다. 한때 한국의 명랑만화 엔딩으로도 자주 만나는 장면이었으니 인지했든 하지 못했든 이러한 문법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오도시'에 해당하는 부분이 순화되어 호통 대신 '어이쿠'하며 뒤집어지는 형태로 대체되긴 했지만. 아유 순한 맛.

이제는 웹툰 작가인지 예능 콤비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 인기 듀오 ‘침펄’, 이말년과 주호민 콤비도 사실상 만자이 콤비에 가까워 보인다. 주로 주호민 씨가 놀림을 받는 보케를 담당하고 이말년 씨가 그럴듯한 궤변을 자주 늘어놓는 츳코미 캐릭터에 가깝지 않나. 주호민 씨는 주로 놀림받는 자신을 가리켜 “타격감이 좋은 것 같다”고 말하는데, 전형적인 보케의 캐릭터인 셈이다. 이런 역학관계는 국내에서도 각종 예능과 코미디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물론 “이게 다 만자이의 변주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무리일 것이다. 지금은 한국의 콘텐츠들도 그런 영향에서 많이 벗어나, 한국만의 독자적인 세계가 단단히 구축되어 있지만, 그만큼 <콩트가 시작된다>가 그리고 있는 콩트 만자이의 세계도 우리에겐 꽤나 익숙한 감성이란 뜻이다.


솔직히 나는 다른 건 몰라도 1편에 나오는 '맥베스'의 '물 문제' 콩트는 꽤 재밌었는데, 극 중 인물들이 하나 같이 재미없는 콩트라고 얘기하는 걸 보니 역시나 내 코드는 비주류인가 하는 진지한 의구심에 봉착하기도 했다.


나의 이야기는 어디까지 가 닿는가.

PD도 마찬가지고, 만화든 글이든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듣게 되는 소망이 있는데,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하는 막연한 바람이다. 그게 삶을 뒤흔드는 충격이든 소소한 영향이든, 그냥 잠시 보고 휘발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흔적을 남기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창작자들이 많다. 주로 경력이 짧을수록 자주 발견되는 소망이고, 연차가 올라갈수록 그런 변화에 대한 바람이 없거나, 오히려 그런 영향 자체를 두렵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아진다. 혹은 정말 그걸 바랐고 그 비슷한 언저리에 닿았으나, 해변가 모래 위의 글자처럼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이야기의 힘'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실감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미생> 드라마와 원작 만화가 공히 히트를 치면서 비정규직 노동환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공론화되는 모습은 고무적이었지만, 그 결과로 나온 '장그래법'은 그 이름이 무색한 구색이었다는데서 원작자 윤태호 작가의 허탈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콩트가 시작된다>의 주인공들이 망했다고는 했지만, 오히려 이들의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열혈 팬 리호코다. 모두가 재미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콩트 때문에 삶의 구원을 얻은 사람. 10년 동안 인기가 없어 약속대로 해체한다는 주인공 앞에서, 내가 지켜봤고 내가 좋아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백만 명이 한 시간 동안 깔깔깔 웃고 나서 바로 까맣게 잊어버리는 이야기가 더 가치 있을까, 아니면 오직 한 사람의 삶을 수렁에서 건져 올려 준 이야기가 더 가치 있을까. 후자라고 답할 사람도 많겠지만, 일단 그건 돈이 안 된다.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면 망설임 없이 한 사람의 삶에 가닿는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그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직업이 걸려 있다면 대답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 시간 동안 즐거울 수 있도록 만드는 힘 또한 어마어마한 가치다. 해보면 알겠지만, 이게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질문은 까맣게 잊어버린다고 했지만 한 시간을 정말 즐겁게 웃은 경험은 쉽게 잊혀지지도 않을 거다.


질문이 너무 극단적인 양자택일이다. 수많은 창작자들은 매일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균형 잡기를 하며 부대끼고 있다. 나 역시 항상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고민하는 대중 연출자로서 해묵은 질문을 다시 되새길 수 있는 드라마였다. 나는 사랑하지만,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하지만 단 한 사람에게는 목숨 같은 무대를 만들어낸 젊은 창작자. 다 보고 나면 삶을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드라마다.


그렇다면 나머지 드라마 하나는 방금 말했던, "그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직업이 걸려 있"는 이야기다.

<중쇄를 찍자!>. TBS. 2016.

<콩트가 시작된다>에 비하면 나온 시점이 좀 지난 만큼 국내에서는 훨씬 유명한 드라마. 일본 방영 당시의 시청률은 <콩트>와 비교해서 딱히 더 높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유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다 보니 알고 있거나 실제로 본 사람은 훨씬 많은 듯하다. <콩트>가 인기 없는 젊은 창작자의 이야기라면, <중쇄를 찍자!>는 제법 인기 있는 출판사의 주간 만화 편집자들의 이야기다. 일단 주인공들이 실제 창작자 그 자신이 아닌 만큼 창작 그 자체보다는, 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좀 더 현실적이고 직업적인 이야기들이 주가 되는데 이게 또 굉장히 감동이 있다. 물론 일본 특유의 만화적인 과장을 좀 섞은 현실이지만.


창작자가 아닌, 편집자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으로서, 나는 책을 영화로 비유하자면 저자가 감독일 거라고 생각했다. 방송이나 영화처럼 엄청나게 많은 스탭들이 협업을 펼치는 분야에 비하면, 책의 저자는 그야말로 전능하지 않나. 오로지 혼자서 줄글로만 자유롭게 자기 머릿속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으니.

그런데 직접 책을 내는 작업을 해보니, 물론 여전히 감독의 역할도 있지만 저자는 배우에 가깝더라. 남은 감독의 역할은 편집자의 몫이다. 저자가 써낼 글에 대해 여러 차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예상되는 독자를 함께 그려보고, 어떤 메시지를 어떤 결로 담아낼 것인지 함께 고민한다. 마치 감독의 디렉션을 듣고 연기를 꺼내는 배우처럼. 배우의 연기가 저자의 글인 셈이다.


당연히 내가 책을 내본 경험이 없는 초짜 저자라서 더욱 그런 경향이 강했을 것이다. 자기 세계와 독자가 얼마나 단단하게 다져진 저자인지에 따라 편집자와의 역학 관계는 다양하게 달라지겠지. 영화판에서도 경력이 쌓인 어떤 배우들은 신인 감독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반대로 감독 스스로가 대배우의 위용에 눌려 선뜻 적극적인 디렉션을 못 줄 때도 있고. 하지만 저자가 이번에 책을 처음으로 써내는 입장이라면, 편집자는 사람을 '저자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인 셈인 거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여러 경로가 있지만, 아무 기반이 없는 저자가 자기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해 '이 원고를 책으로 내주세요!'해서 출간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공모전 수상이 아닌 이상 거의 드물다. 대부분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먼저 저자에게 출간 제안을 한다. 요즘에는 워낙 누구나 자기 글을 보여줄 수 있는 플랫폼이 많다 보니, 편집자들도 이런저런 플랫폼을 배회하는 것 같다. 글을 보다가 정말 괜찮은 글을 쓰는 사람을 발견하면 '일단 책 하나 같이 써봅시다' 하면서 그때부터 무슨 책을 쓸지 함께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편집자 자신이 어떤 주제나 키워드에 대한 책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이를 가장 잘 써줄 적절한 저자를 물색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시작은 편집자의 '기획안'이다. 책을 '쓰는' 사람은 저자이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은 편집자인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꼭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뭔가를 만들 때 이게 남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면 힘이 안 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항상 창작자 자신이 아닌, 창작자 곁에서 함께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나의 창작물'이 아닌 무엇인가를 함께 만들며 애쓰고 고민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중쇄를 찍자!>에서도 자주 묘사되는 장면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창작자 자신보다 그의 작품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경우 창작자들은 자신의 결과물을 부정할 수 없이 사랑하지만, 동시에 가장 의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책을 두 권 써냈고, 이제 세 번째 책을 쓰고 있는 중이지만 여전히 내가 쓰는 글이 돈을 주고 사 읽을 만한 글인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책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출판사의 편집자 분들이 그렇게 하자고 제안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그냥 읽고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고 이 분들은 그걸 업으로 삼는 사람들인데 이 분들의 눈이 더 정확하겠지. 이 분들이 이게 책으로 낼 만한 글이라고 하니까 믿어보자. 이렇게 판단과 평가를 외주화 하는 것은 마음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용기가 된다.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기 안의 무언가를 꺼내놓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중쇄를 찍자!>는 그렇게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애정과 진심을 잘 그려내고, 그래서 비슷한 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비교할 수 없는 위로를 얻는다.


그래도 아직은 건재한, 일본의 출판시장

솔직히 <중쇄를 찍자!>라는 제목을 봤을 때, 부끄럽게도 우쭐한 마음이 잠시 들었다. 국내에서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작가의 1차 목표는 '중쇄', 그러니까 처음 찍은 1쇄가 다 소진되어 두 번째 인쇄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작 2쇄를 찍은 정도로 '성공'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망하지는 않았다' 정도의 평가는 들을 수 있는 분위기다. 그래서 이걸 대강 아는 사람들은 잘 나간다는 책을 발견하면 뒤쪽을 펼쳐 몇 쇄까지 찍었는지부터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이 '쇄수'로 판매량을 부풀려 보이기도 하는데, 실은 '몇 쇄'라는 숫자에 있어서 각 쇄당 몇 부를 찍을 것인지는 출판사 마음이기 때문이다. 딱히 엄청난 판매가 기대되지 않는 작가들의 책은 1쇄를 2000부 정도 찍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1000부나 3000부를 찍기도 한다. 정하기 나름이다. 그러니까 3000부를 1쇄로 찍을 것을, 1000부씩 찍어내면 순식간에 '3쇄'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책에는 몇 부씩 찍었는지 쓰여있지 않으니 '3쇄'란 숫자만 본 독자들 입장에서는 "오 그래도 꽤 잘 팔렸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애초에 첫 쇄부터 엄청난 판매량이 약속되어 있는 인기 작가들의 경우는 초판 몇만 부를 여러 쇄로 나눠 찍어 나오자마자 10쇄를 기록하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중쇄가 목표'인 드라마라니. 우쭐함의 이유는 그래도 내가 낸 책들은 1쇄는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첫 책 <살아갑니다>는 1쇄 2000부, 두 번째 <서울에 내 방 하나>는 3000부로 시작해서 어찌어찌 1쇄는 다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물론 거기까지라서, 아마 두 번째로 찍었던 각각의 1000부는 어딘가에 재고로 고스란히 쌓여있을 것이다. 자랑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 우쭐한 마음이 들었던 사실 자체가 부끄러워진 이유다.

근데 그 정도 부끄러움으로는 한참 더 부족하다는 사실이 이내 드라마 2화에 나온다. 주인공이 속한 편집부의 와다 편집장이 옆팀의 영업부장에게 버럭, 화를 내며 내뱉는 대사가 이거다. "신인 작가의 초판 단행본이 얼마나 중요한데 고작 최소 부수인 5000부라니!" 그래. 일본은 신인 작가의 최소 발행부수가 5000부다. 담당 편집장이 화를 낼 정도로. 고작 3000부로 2쇄 찍었다고 잠깐 우쭐한 사람 누구냐 빨리 도망가라.


그마저도 2016년 드라마 제작 당시 '최근의 추세를 반영한 숫자'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 그로부터 6년이 더 지난 지금은 더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과 일본의 인구 규모를 비교하면 이제 일본도 한국의 도서시장과 비슷한 상황이려나. 물론 이 드라마가 다루는 '출판 만화' 시장에서 만큼은 완전히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보며 또 한 번 마음이 울렁이는 것은, 여전히 건재한 서점들의 모습이었다. 주인공 코코로와 영업부서의 준은, 작품성에 비해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작품의 판매량을 올리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지역 서점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영업을 뛴다. 이 드라마에서 작가나 출판사 직원들만큼이나 중요한 플레이어로 등장하는 이들이 바로 서점의 사장님들이다. 몇몇 대형서점이 거의 모든 도시의 서점들을 집어삼키고, 그마저도 대부분의 도서 구매는 온라인 서점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 비하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지역의 서점들은 아직도 건재해 보였다.

물론 이러한 서점들의 어려움도 드라마에서 잠시 다뤄지긴 한다. 서점들이 속속들이 문을 닫고, 남아있는 서점들도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면들. 하지만 여전히 서점을 운영하며 책을 좋아하고, 좋은 책을 만나면 이걸 더 잘 팔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서점 주인들의 모습이 그려질 때 눈물이 자꾸 차올라서 혼났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모두가 순수한 마음으로 이를 응원하고 더 잘 알려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 그저 드라마 속 과장된 묘사가 아니라, 나 역시 실제로 마주쳤던 그런 장면들이 떠올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저 직업이라서가 아니라, 이 직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그래서 더 잘 팔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을 그리는 이 드라마가 준 위로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기 어려웠다.


어릴 적 놀러 갔던 서점 주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네에서 서점을 하고 있는 사장님들은 어쩐 일인지 그냥 느낌이 좋았다. 얼마 안 되는, 무섭지 않은 어른들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그 얼굴들 아래는 그런 마음들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동안 동네 서점들이 자꾸만 대기업 브랜드의 여파 속에 사라져 가더니, 최근에는 조금은 다른 모양새의 '독립서점'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대형 서점 브랜드를 공유하지 않는, 지역에 자리 잡은 작은 서점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나의 어릴 적 기억 속 '동네 서점'들과 최근 생겨나는 '독립 서점'들의 차이는 글쎄, 참고서와 여성지를 팔고 있는지의 여부 정도 아닐까 싶다. '월간 낚시'라든지 이런 것들.

작품을 사랑하는, 그래도 직업

이 드라마가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과장되게 낙천적인 만화적인 드라마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직업'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묘사한다는 사실이다.

극 중 유일한 악역이라면 악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편집부의 선배 '야스이'는 그러한 면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작품과 작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응원하려 애쓰는 주인공 코코로 앞에, 이건 그냥 일일 뿐이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보다 '잘 팔리는' 책을 만드는 것뿐이라며 대척점을 세우는 인물. 그리고 실제로 그걸 굉장히 잘한다.


맞는 말이다. PD들도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지만, 결국 시청률이 제대로 나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처음 책을 내고 나서 내가 스스로 내 책을 알리고 자랑하는 일이 부끄러워 소극적이었던 나에게, 베스트셀러를 낸 경험이 있는 선배가 나무라며 한 말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그 사람들은 니가 쓴 그 책을 팔아서 월급을 받는 거야." 그러니 저자가 소극적이면 결국 함께 한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라는 뜻이다.

극 중 '야스이'는 입체적으로 잘 그려진 인물이다. 흥행작을 만들기 위해 때때로 무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도 곰곰이 뜯어보면 딱히 선을 넘는 경우는 없다. 오히려 선을 너무 잘 지켜서 매정해 보일 뿐. 회사에서는 꾸준히 성과를 내고 가정에서도 온전히 충실하다. 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일꾼이자 남편이자 아빠다. 사실 현실의 우리 대부분은 야스이 반만큼만 일해도 꽤 괜찮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선을 지키는' 인물이 된 역사도 명확하다.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스트라이프 티셔츠만 아니면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독자이자 시청자로서, 그렇게 공식을 잘 따르며 매끈하게 잘 빠진 상품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나오지 않는, 선을 넘어갔을 때만 만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작품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 작품들은 흔히 '걸작' 혹은 '괴작'이란 칭호를 받고, 그런 작품들이 꾸준히 나와주어야 시장은 정체되지 않고 점점 커져간다. 야스이처럼 일해서는 동시대의 성과를 어느 정도 만들어 갈 수 있겠지만, 지속적으로는 점점 재미없고 정체된 시장으로 쭈그러들어 갈 것이다. 한때 세계 영화계에서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냈지만, 급속도로 내수용 오락 시장이 되어가는 일본 영화계가 비슷한 모양새다. 방송 예능 시장에서도 뭔가 하나 히트작이 나오면 한동안 흥행의 공식이 답습되지만, 그게 유효한 것은 고작 몇 년뿐이다. 사람들은 금방 피로감을 느끼고 공식을 벗어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단순한 일이 아니라 '이야기'와 '작품'을 만들어내는 직업이라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어느 업계나 '혁신'과 '도전'을 끊임없이 부르짖는 것을 보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직업'으로서의 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인물이자, 내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인물은 '누마타'다. 극 중 등장하는 대가의 장수 어시스턴트. 대가는 실제 일본 만화로 따지만 아마 <드래곤볼>의 '토리야마 아키라' 정도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스승 밑에서 10년 넘게 보조작가로 일하는 캐릭터다. 인상도 좋고 실력도 좋아 보인다. 아마 회사에서 선배로 만난다면 가장 편하게 만나며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데뷔 때는 나름 상도 탔고, 주변에서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입문했지만, 투고하는 원고마다 번번이 거절당하며 연재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어시스턴트로만 눌러앉은 지 이미 20년째. 이제는 스스로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내심 생각하고 있지만 차마 그걸 대놓고 들춰 인정할 자신은 없어 보인다.


드라마는 끝내 그가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며, 평생을 사랑했던 만화를 뒤로 하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으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드라마에서 그리는 일본이 좋아 보이는 이유다. 서울에서 포기해도 돌아가 비빌 언덕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가게 한쪽에 능숙한 솜씨로 그린 그림 한 장이 더더욱 서글프게 느껴졌다.


누마타는 단순히 운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운 좋게 데뷔해서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는 작가들 중에 그보다 재능이 없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잠시지만 그의 작품을 알아봐 주는 후배 작가의 모습도 묘사된다. 그러니 다시 한번, 이렇게 흔들릴 때 누군가가 곁에서 정확하게 인정해주고 기회를 주는 것만큼 중요한 힘도 없다. 작가는 늘 자신을 의심한다. 누마타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속으로 고민했다.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다. 어릴 적엔 꽤나 재능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신나게 이 업계까지 들어왔는데, 정작 들어와 보니 세상은 너무 크고 대단한 사람들은 너무 많다. 열심히 만들어낸 것들도 그리 대단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시간만 하루하루 더 쌓여간다.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재능마저 닳아 버리진 않을까. 하루에도 수없이 나는 잘할 수 있을까 되물으며 의심하고 흔들린다. 애매한 재능과 너무 큰 애정을 가진 사람. 그리고 충분히 뻔뻔하거나 건방지지 못했던 사람. 나는 누마타가 좋았고, 누마타가 잘 됐으면 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릴 때마다 주인공만큼이나 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마음에 진하게 남을 드라마.


아 물론 오다기리 조가 너무 잘 생겨서 금방 마음속 누마타 얼굴을 치고 올라오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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