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야 할 일>
MBC에 있던 8년 동안 뇌리에 강렬하게 목소리가 새겨진 경험이 딱 두 번 있다. 동료PD나 작가의 목소리도 아니고, 존경하던 조합원 선배들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두 번 모두 들을 당시에는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었던 전화기 너머 인사부 직원의 목소리였다.
그중 한 번은 신입공채 최종면접이 끝난 밤, 합격 소식을 들려주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권성민 씨,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나는 원체 감정 표현이 심심한 편이라 합격 소식을 듣고도 네, 감사합니다. 무던하게 대답했더니 (실은 실감이 잘 안 나서 그랬던 것도 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너무 침착하다며 그 목소리가 살짝 당황하던 기억이 1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업무 가운데서도, 자기 합격 전화만 기다리고 있을 응시자에게 생애 가장 반가운 소식 중 하나를 전하고 그 반응을 마주하는 일이 내심 아주 즐거운 순간이었을 텐데, 그의 즐거움을 빼앗은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머지 한 번은 이제 막 4년 차 PD가 되던 해 1월, 인사위원회 결과를 전해주던 역시나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였다. 당시 유배 되어 있던 수원의 사무실 문 앞에서, 일과 시간의 끝이 다가오던 4시였는지 5시 즈음, 회사 번호로 전화벨이 울릴 때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역시나 나는 무딘 편이었지만, 전화기 너머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길지 않은 문장을 말하는 어절 사이마다 젖은 여백들이 길었다.
권성민 씨. 인사위원회 결과. 해고. 되셨. 습니다.
짓이겨 나오는 것 같던 참담한 그의 목소리에, 내 징계고 뭐고 그가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결정이 아닌데. 그의 책임이 아닌데.
그가 내게 죄송하다고 했는지 아니면 다른 말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통보 외에 짧은 몇 마디를 덧붙였고, 나는 괜찮다고 너무 그러실 필요 없다는 말을 진심으로 돌려주었다. 그에게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귓전에 맴돈다.
12년도에 입사하자마자 동기들 모두 파업 대오에 참여했을 때, 회사 필수 직군으로 배정된 동기 한 명은 홀로 회사에 남아야 했다. 우리는 모두 괜찮다고 그를 격려했고 실제로도 정말 괜찮았지만 그는 늘 석연치 않아 보였다. 우리는 '회사', '사측'이라는 이름에 대항했지만, 실제로 그 '사측'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얼굴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조지 클루니가 등장하는 영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인디에어>에서, 조지 클루니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기업의 해고 업무를 대행해 주는 전문가다. 아무리 자유로운 해고의 왕국 미국이라도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일은 여러 위험과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라, 말하자면 감정 노동을 대행해 주는 셈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의 전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지적했지만, 때문에 우리는 노동에서 소외되는 동시에 노동의 생산물에 응당 지불해야 하는 감정들도 깔끔하게 제거한 채 유익만 누리는 사회에 익숙해졌다.
몇 년 전 '병아리를 직접 키워 닭도리탕을 해 먹는' 예능 <식량일기>가 공개되었을 때, 예능의 윤리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도리어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원래 생명이라는 사실에 응당 부담했어야 하는 감정적 지불을 너무 손쉽게 제거하고 사는 것이 더 비윤리적이지 않은가 싶었다.
'병아리와 닭도리탕'은 유독 대비가 선명해서 눈에 띄었지만, 실제로 우리가 구입해 사용하는 수많은 소비재들 대부분이 생산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비윤리성을 경유한다. 가격이 싸서 선택한 것일수록 더욱. 자본주의와 대량생산 사회는 그렇게, 우리를 수많은 노동의 윤리로부터 분리시키고 손쉽게 이득만을 취하게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기업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지 클루니가 회사의 감정적 부담을 대리해 주듯, 나에게 전화했던 인사부 직원은 회사의 이상한 결정이 치렀어야 하는 감정적 부담을 본인이 다 떠안았다. 소비할 때도 생산할 때도 원래 치렀어야 하는 사람이 치르지 않은 감정의 지불은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전가된다. 시스템은 그것을 보이지 않게 교묘하게 가릴 뿐이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은 조금씩 그 가려진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고통에 무뎌지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킨다.
영화 <해야 할 일>은 '정리 해고'라는 어쩌면 한국 영화에서 익숙한 소재의 서사를 가져와, 이전까지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그 정리 해고의 실무자, '인사팀'을 무대에 세운다. 얼굴 없는 시스템으로 그려지던 그들의 얼굴 가까이 카메라를 댄다. 그러자 거기에는, 여전히 내 귓가에 살아있는 인사팀 직원의 참담한 목소리가 고스란히 떠오른다.
실제 기업의 인사팀 직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감독답게, 아마도 자전적인 배경이 어려있을 인사팀 직원들의 묘사는 생생하게 건조하다. 덕분에 지나치게 비장해지거나 설교적일 수 있었던 소재의 영화는, 대사도 연출도 앵글도 매번 적절한 순간에 멈춘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매번 거기서 멈추는 영화는.
아무리 비장하고 비극적인 맥락 위에 던져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일상을 산다. 아무리 참담해도 밥을 씹어 삼키고, 담배를 빨고, 잠을 자고 샤워를 하며 작은 농담이라도 주고받아야 한다. 그래도 된다. 그래야 산다. 사람을 죽인 수감자에게도 밥은 나온다.
이 영화는 자주 악마로 묘사될 수 있는 '정리해고 인사팀'의 일상을 그려내면서, 노동의 소외에서 다시 한번 소외되는 이들의 얼굴을 성공적으로 담아낸다. 동시에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카메라를 직접 비추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게 일러준다.
최근 개봉했던, 시대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배경을 그린 영화 <빅토리>에서도 이러한 맥락이 중요하게 다루어 진다. 영화는 이혜리 배우가 분한 '필선'이 치어리딩을 통해 자신의 꿈을 좇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유대와 가치를 주로 그리지만, 못지 않게 무게를 두고 있는 인물은 '필선'의 아버지 '우용'이다. 그는 <해야 할 일>과 같은 조선소의 중간관리자로 등장한다. 노동자들과 사측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고민하는 인물.
<빅토리>는 청춘영화로 자신의 자리를 정한 영화라 이러한 면들이 상대적으로 핍진하게 그려지진 않지만, '우용'이라는 인물이 영화 안팎으로 지니는 의미에 대해 soulblue 님의 글을 첨부한다. (https://brunch.co.kr/@soulandu/112). <해야 할 일>은, 조금은 동화 같던 <빅토리> 속 우용의 고뇌를 좀 더 현실적으로 해부한 영화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혹은 우용처럼 동화 같은 용기를 낼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영화. 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화.
무대 인사를 하러 나온 배우들이 이 영화를 일컬어 "즐거운 영화"라고 하기에, 제목도 포스터도 카피도 어느 하나 즐거울 구석이 없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보니, 그럼에도 즐거운 구석이 많은 영화다. 그래야 사니까. 그러니 제목과 소재와 포스터에 너무 겁을 먹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을 권한다. 무겁지만 그럼에도 삶의 결을 즐겁게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