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를 하다가 기절한 사연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할 때 새로운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경험해보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경험해보는 사람도 있다. 주로 나이가 어릴수록 다양하고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자 하지만 나이가 조금 들게 되면 다양한 것보다는 내 취향에 맞는 것들을 선택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전 글에서 나는 경험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핀란드에서 내 취향이 아니었던 것들도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사우나'였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대중목욕탕이나 사우나 심지어 찜질방도 별로 가지 않았던 사람이다. 일단 사람들이 심지어 나체로 북적거리는 것도 싫고, 목욕탕 특유의 습하고 미끌거리는 느낌이 싫었다. 사우나는 들어가자마자 숨이 막혀서 5분을 채 앉아있지 못했고, 찜질 외에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숙박도 할 수 있는 찜질방도 나에겐 이상하고 불편한 공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핀란드에 가자마자 사우나를 좋아할 리는 없었다. 20대의 어린 친구들은 야외 사우나에 가서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 망설임 없이 얼음 호수에 뛰어들어 극강의 추위를 맛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나는 저러다가 내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 무모한 도전보다는 몸을 사리게 되었다.
핀란드인들의 사우나 사랑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사우나(Sauna)라는 단어도 핀란드어에서 비롯되었으며 내가 살았던 도시 탐페레는 공식적인 "세계의 사우나 수도"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라야뽀르띠(Rajaportti)라는 사우나와 나씨야르비(Näsijärvi)에서 수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라우하니에미(Rauhaniemi) 사우나는 탐페레의 유명한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탐페레 외에도 수도 헬싱키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도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핀란드에서 '꼭 가봐야 할' 공공 사우나 15곳 — VisitFinland.com). 그뿐 아니라 핀란드 사람들의 집 대부분에는 전기 사우나가 갖춰져 있어 집에서도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 내가 살던 학생 기숙사에도 사우나가 갖춰져 있었고 시간대별로 예약을 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수영복을 입고 다 같이 사우나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혼자서 사우나를 즐길 수도 있었다.
핀란드의 사우나는 건식 사우나로 안에 들어가면 돌이 담긴 스토브가 있다. 그 돌을 뜨겁게 달군 후 돌 위에 물을 뿌리면 곧이어 뜨거운 공기가 훅 하고 올라온다. 열기가 가라앉으면 다시 돌 위에 물을 뿌려 후끈한 사우나를 더 즐길 수 있다. 중간에 나가서 샤워를 하거나 시원한 공기를 쐬고 다시 사우나에 들어가기도 하며, 야외 사우나라면 얼음 호수에 잠시 들어가 몸을 담근 후 뜨거운 사우나로 다시 들어간다. 또한 사우나 안에서 비흐따(vihta) 혹은 바스따(Vasta)로 불리는 자작나무로 몸을 두드리기도 하는데, 얼음 호수에 몸을 담그고 비흐따로 몸을 두드리면 혈액 순환과 피부에도 좋다고 한다.
핀란드인들에게 사우나는 사교의 장소이기도 하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을 때 핀란드인들은 사우나를 같이 하자고 초대한다. 사우나 안에서 함께 음료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지는 시간을 가진다. 대중 사우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우나에는 나체로 들어가는데 핀란드인들에게 나체로 사우나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평소에는 말만 걸어도 새하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핀란드인들인데 사우나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체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나에게는 신기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래서 벌어진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그 당시 서로 호감을 가지고 만나기 시작하던 핀란드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만난 지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되던 때에 집에서 같이 사우나를 하자고 하면서 나를 초대했다. 얼떨결에 알았다고는 했는데 초대를 받은 이후로 내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집에서 단 둘이 사우나를 하자고? 수영복을 가져가야 하나? 아님 그냥 나체로 해야 하나? 사우나를 하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에게 내 나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같이 사우나를 하자고 하는 그의 자연스러운 제안이 나에겐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날이 다가왔다.
우선 시내에서 만나 펍에 가서 맥주를 한 잔씩 했다. 나는 술이 정말 약해서 술이 들어가기만 하면 온 몸이 빨개지고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이날은 긴장해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던 게 화근이었다. 밖에서 맥주를 마신 후 같이 집에 가서 그가 사우나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는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진 채 먼저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는 혼자 남아서 전전긍긍하다가 초면에 도저히 나체를 보여줄 수는 없어서 수건을 몸에 두르고 들어갔다. 그는 수건을 두른 내 모습을 보더니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수건을 벗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수건을 벗지 못했다. 그는 편안하게 맥주를 마시며 사우나에 앉아있다가 나가서 샤워도 하고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사우나를 즐겼지만 나는 어색함과 불편함 속에 또다시 맥주만 들이켰다. 그러다가 한계가 왔다. 숨이 막혀서 잠시 바깥공기를 쐬어야겠다고 하고 사우나에서 나가 그의 집 테라스로 나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 필름이 끊겼다.
드라마의 장면처럼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저 멀리서 효과음처럼 들려왔고 그 목소리는 점점 커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차가운 공기가 느껴져서 눈을 떴다. 수건은 이미 널브러져 있었고 나는 테라스에서 거의 나체로 그의 무릎에 누워있었다. 뜨거운 사우나 안에 있다가 갑자기 찬 공기를 쐬었던 데다가 술기운까지 더해져서 그만 기절을 해 버렸던 것이다. 태어나서 기절이란 걸 처음 해봤다. 그는 엄청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놀라고 걱정했다며 괜찮냐고 했지만, 나는 괜찮은 것을 떠나서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바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라스에 그대로 누워서 조금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옷을 대충 입고 완전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또다시 소파에서 그의 무릎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조금 더 누워있으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좀 더 쉬었다가 가라며 만류하는 그를 뒤로 하고 나는 민망함에 정말 미안한데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며 바로 그의 집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혼자 이불 킥을 하다가 잠든 후 다음날 일어나니 온 몸이 쑤셨다. 왜 이렇게 몸이 쑤시지? 하며 몸을 살펴봤더니 팔에 오로라와 같이 넓게 일렁이는 듯한 멍이 퍼져있었다.
그날의 해프닝 때문은 아니었지만 다른 계기로 인해 그 사람과 인연이 계속되지는 않았고 더 이상 그와 사우나를 할 기회는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찔하고 아픈 기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것도 참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사우나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은 아니다. 몇 번 더 사우나를 해보면서 피곤할 때면 사우나에서 피로와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핀란드에서 알게 된 가족들과 함께 좀 더 자연스럽게 나체로 사우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핀란드의 춥고 어두운 겨울 속에서 핀란드에서 사우나가 왜 사교의 장소이면서 사색의 장소, 힐링의 장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술이 약하거나 심혈관 질환이 있다면 사우나에서 음주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