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식하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도 두 달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6월 중순 어느 날, 농촌은 보리를 타작할 때 나오는 원동기 소리와 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예기치 않게 실질적 가장이 된 나는 논의 물꼬를 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자전거 주행 시에는 전방을 주시하게 되어 있는데, 사람에게는 영감(靈感)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 빨래터를 지나칠 무렵, 오른쪽에서 뭔가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빨래터의 물 위에 떠 있는 하얀 물체가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급히 자전거를 세우고 내려가니 어떤 할머니가 물속에서 엎어져 팔, 다리를 힘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는데, 수수깡처럼 마른 팔과 풍선처럼 가벼운 몸무게가 느껴졌다. 이 할머니는 외지에서 온 분으로, 우리 동네 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돌봐주고 빨래도 하면서 겨우 밥이나 얻어먹고 지내는 처지였다.
할머니를 물에서 빨래터에 눕히고 보니 얼굴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빨래터의 수심은 50cm 정도밖에 되지 않아, 익사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노인이 쪼그려 앉아 빨래를 하다가 고혈압이나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물에 빠진 것 같았다.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던 할머니의 호흡 간격이 점차 길어지고, 눈동자의 초점도 점점 흐려져 갔다. 나는 그 눈동자를 통해, 무언가 간절히 애원하면서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짐작건대, 숨을 겨우 쉬는 상황에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게 인생의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할머니의 숨도 끊어졌다.
인간으로 태어나 70여 년을 살다가 예기치 못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지금, 주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갑작스럽게 눈을 감아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점점 흐려져 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이러한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혼미한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현실로 돌아온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씻긴 다음 빨래터 옆 평지에 눕혔다. 곧바로 인근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던 마을 이장을 찾아가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부음(訃音)을 알렸다. 탈곡기에 보릿대를 쑤셔 넣고 있던 이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 바쁜 농번기에 죽으면 어떡해”
삶과 죽음이 어찌 인간의 의지에 의해 지배될 수 있으랴. 하지만 농번기에는 개도 바쁘게 뛰어다닌다는 농촌 현실에서 어느 정도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읍내 파출소 순경으로부터 소환통지를 받았다. 망자(亡者)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파출소에 호출되어 조서를 작성해야 한다. 나는 그곳에 들러 11페이지에 해당하는 조서에 지장(指章)을 찍음으로써, 이승에서의 할머니의 생을 마무리 지어 드렸다.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처럼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만고불변의 진리임에도 인간은 평소에는 죽음을 지각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이 죽는 시점을 인식할 수 있으면, 삶에 대한 의욕과 흥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나태하거나 소홀해질 가능성이 크다.
삶이 고달프거나 힘들다고 생각될 때면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린다. 할머니처럼 예기치 못하게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떤 심정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될까 생각하면서. 우리 같은 필부(匹夫)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지나간 삶에 대한 아쉬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