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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송 Sep 27. 2023

캠퍼스에 낭만은 없었다

    암울한 질곡으로 점철된 1년의 휴학 기간도 끝나고 다시 봄이 돌아왔다. 일반휴학의 경우, 1년 이상 휴학을 할 수 없다는 당시의 학칙 때문에 봄 학기부터는 복학을 해야 했다. 건강도, 가정형편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집을 떠나자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복학원을 제출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 위해 학생생활상담소에 들렀다. 하숙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집에서 가정교사를 구한다고 해서 그리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 가래 속의 결핵균 유무를 판별하는 도말검사 결과는 음성이어서 전염성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학년 학과배정 때 원하는 학과를 배정받기 위해서는 학교 공부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학교와 아르바이트 집을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5월의 대학은 봄의 향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랏빛 라일락꽃은 짙은 향기를 발산하였고, 여학생들의 옷은 화려해졌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나에게 캠퍼스의 낭만은 한갓 사치품에 불과했다. 6월 초순,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와 학업으로 인해 바닥난 체력을 재충전하기 위해 고향으로 낙향해야만 했다.

     2학기 개강이 시작되자, 흩어졌던 학우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우리는 같은 계열에 적을 둔 동지이면서 학과 배정에 있어서는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경쟁자였다. 입시 지옥을 벗어나 처음 맞은 방학 동안 잘 먹고 잘 쉰 탓인지 다들 살이 통통 올라 있었다. 그들과는 반대로 비쩍 마른 나를 보고, 무리하게 공부해서 몰골이 흉악한 것 같다는 본말이 전도된 급우들의 말을 듣고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초순, 날씨가 쌀쌀해지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식욕이 떨어지고 무기력한 증상이 나타났다. 보건진료소에 들렀더니 젊은 의사(레지던트였던 것으로 추측된다)가 차트에 ‘slight aggressive’(약간 공격적)이라고 쓰면서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당장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매달 하숙비를 송금해야 하는 어머니에게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투병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당시의 대학 생활 역시 외줄을 타거나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되었다. 동시에 우리들 앞에는 학과배정이라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400명 정원의 사회계열 학생들은 1학년 학점을 기준으로 법대, 경영대, 사회대 3개 대학에 소속된 학과로 배정받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법학과, 경제학과, 경영학과 3대 학과의 정원이 300명 정도여서, 웬만한 성적이면 원하는 학과에 갈 수 있었다. 이 학과배정이라는 의사결정에 있어서도 최우선적으로 고려된 요인이 건강문제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또다시 몇 년 동안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순수과학보다는 실천적인 응용학문이 내 적성에 맞는 점도 고려되었다. 결국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제일 무난한 학과라고 여겨지는 경영학과에 지원하였다.

    경영학과에 진학하자, 학과 공부는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건강상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어 비싼 하숙비를 매달 송금받아야 했기에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여동생 3명이 모두 학생인 데다가, 어머니 혼자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기에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비뚤비뚤한 손 글씨가 새겨진 우편봉투 속의 통상환증서를 꺼낼 때마다 내 마음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겨울로 접어든 11월 중순, 집에서 부쳐 오던 하숙비가 끊겼다. 하숙집 주인에게 양해를 구했지만 당장 나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손수레를 하나 빌려 짐을 싣고 재수 시절에 이용하던 독서실로 향했다. 짐이라고 해봐야 이불보따리 하나와 책 몇 권, 옷 서너 벌이 전부였다. 하숙집이 있던 삼청동에서 독서실이 위치한 누하동으로 가려면 광화문 앞을 지나야 만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바람마저 차가웠던 초겨울 저녁, 망망대해처럼 넓은 광화문 광장을 손수레를 끌고 건너갔다. 서울의 밤은 휘황찬란했지만 나의 아픈 몸을 눕힐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내 개인적인 고난과 국가적인 재난인 10.26 사태 등 암울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도 세월은 흘러 3학년이 되었다. 대학생활도 반환점을 돌아 이젠 2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다시 봄을 맞은 대학 교정에 라일락 향기 대신 최루가스가 난무하더니 학교가 문을 닫았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린 것이다.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도 시골집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불행한 사건 속에서도 고향에서의 생활은 정신적, 육체적 안정감을 되찾게 해 주었고, 이로 인해 건강은 점차 회복되어 갔다.  


 

   학교가 언제 다시 문을 열지도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런 심리적 혼란과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일이 땅꾼 체험이었다. 나도 동네 땅꾼 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이 희귀한 직업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더운 여름, 변온동물인 뱀은 체온을 낮추기 위해 시원한 곳을 찾는데, 무덤 앞 상석(床石) 밑이 그들의 최애 장소였다. 어느 여름날, 우리가 우연히 찾아낸 심산유곡 속 무덤의 커다란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맨 앞 다섯 글자는 임금이 하사한 시호(諡號)로 추정되었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다.            


            ‘OOOOO 吏曹判書 迎日鄭公之墓’


    비석을 유심히 지켜보던 멤버 중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어이 또라이, 저기 뭐라고 써 놓았나?‘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그들은 나는 또라이라 불렀다. 하긴 걸리버 여행기 속의 소인국이나 거인국에서는 걸리버가 비정상인으로 보이는 법이다. 나는 이 무덤의 주인인 영일 정씨가 오늘날 행정자치부 장관에 해당하는 높은 벼슬아치였고, 무덤의 상석을 훼손한 우리는 예전 같으면 능지처참을 당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인간처럼 영혼의 폭이 광범위한 존재는 없다. 사람은 지구상의 동물 중 가장 뛰어난 지능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다. 중남미 나라에서 보듯이, 대졸 출신의 인텔리 계층도 며칠만 굶주리면 쓰레기통을 뒤지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뱀을 팔아 번 돈으로 매슬로우(A. Maslow)의 욕구 5단계 중 가장 아래에 위치한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등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알코올을 원했고, 나는 닭다리에 들어있는 단백질을 필요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 귀한 체험은 훗날 수업시간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딱딱하고 복잡한 세금 강의에 학생들이 싫증이 날 때면, 나는 가끔 옛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 경우, 단순히 뱀 잡는 내용으로 그치면 교육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에 약간의 각색이 필요하다.


    “물뱀이나 능구렁이는 인기척을 느끼면 도망가기 바쁘다. 반면, 독사는 웬만한 자극에는 꼼작도 하지 않는다. 간신처럼 경박한 물뱀과 귀족처럼 중후한 독사를 구분 짓는 것은 치명적인 독의 존재여부다. 학생 제군들도 독사의 독처럼 강력한 무기를 연마하여 보람찬 인생을 영위하기 바란다 “


    한 학기 수업을 끝내고 학생들이 제출한 강의소감을 읽고 있던 나는, 어떤 학생이 작성한 소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뱀 잡는 이야기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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