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에 시작된 휴교는 10월 중순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졌던 학우들은 다시 강의실로 모여들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강의가 시작된 지 겨우 한 달 반 정도 지나자 학기말 시험이 시작되었다. 그 해 2학기는 시작하자마자 끝이 난 셈이다. 학기말 시험이 끝난 12월 중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대학 졸업까지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아무런 대책 없이 교문을 나서야 한다는 불안감이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카뮈(A. Camus)는 삶이 시지프의 형벌 같다고 한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조달하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려는 욕구 또한 가지고 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번번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나 역시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시지프였다. 고시공부를 피해 경영학과를 선택했던 사람이 유사한 시험을 준비하는 자체가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많은 경영학과 학생들이 이 시험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상당수는 2학년 때부터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이 시험을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공부해 왔으나, 건강문제와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로 인해 본격적인 시작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예전에 공부하던 재각에 다시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화기(火氣)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곳 온돌방은 오히려 나의 체온 덕을 보려고 했다. 머리에는 털모자, 몸뚱이는 담요, 발은 털신으로 중무장을 해야만 했다. 험상궂은 얼굴과 봉발(蓬髮)이 작소(鵲巢)를 이룬 기이한 몰골로 재각 문을 나설 때면, 떠돌이 개가 괴 생명체를 본 듯 짖어대곤 했다.
4학년이 되자, 졸업을 앞둔 학우들은 몇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유학 준비하는 유학파, 회사 취업하려는 취업파, 회계사 준비 그룹, 부모의 회사를 물려받아 일찌감치 경영일선에 뛰어드는 가업승계파 등이 있었다. 각 그룹의 구성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리 멤버들도 도서관 혹은 스터디 룸에서 그룹스터디를 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갔다.
그 해 처음으로 응시한 공인회계사 1차 시험은 무난히 통과했으나, 2차 시험은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요즘에야 1,000명 정도 합격자를 배출하지만, 당시에는 선발인원이 120명밖에 되지 않았다. 지원자는 많은데 합격자 수가 적어 최종 경쟁률이 100대 1 정도 되는 쉽지 않은 시험이었다. 우리 멤버 중에서는 단 두 명만이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대학교 전체로도 재학 중 합격자는 이들 2명뿐이었다. 남은 응시자들은 내년을 기약하면서 일부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나도 그들의 무리에 끼어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원은 학부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석사학위 후 유학을 가거나, 석, 박사 학위 취득 후 대학의 교수 자리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더 하고자 대학원에 진학한 학우들도 상당수 있었다.
학부과정 때 고생하신 어머니께 면목이 없어, 대학원 과정은 어떻게든 경제적 부담을 드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종암시장에서 가게를 하고 있는 사촌 형님에게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 하셨다. 맨손으로 상경하여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던 형님네도 여유는 없었다. 식료품 가게 2층에 위치한 조그만 창고가 나의 거처였다. 창고 문을 열자, 쌓아 놓은 건고추 마대자루들이 텃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최루가스처럼 매운바람이 얼굴을 확 때리더니 나의 눈물과 콧물을 쏙 빼놓았다. 저녁이 되자 마른 고추 속의 고추씨들이 흘러내리면서 내는 ‘차르르르’ 하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이 소리는 매일 저녁 계속되었다. 위로 올라가는 고추씨가 없는데도 끝없이 흘러내리는 현상을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채근담(菜根譚)에 의하면, 마음의 본체(本體)가 밝으면 어두운 방안에도 푸른 하늘이 있고, 생각머리가 어두우면 대낮에도 도깨비가 나타난다고 했다. 비록 코와 귀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분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경제적,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준 이곳이 나에게는 호화아파트 못지않은 숙소였다.
대학원에서의 첫 학기가 끝난 6월 말, 경영대학(경영학과뿐인 단일학과)에서 회계학 분야 조교를 뽑는다는 공고가 붙었다.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있던 고교 선배가 조교에 지원하라고 압력(?)을 행사해 서류를 제출하게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3명의 지원자 중에 내가 선발되었다. 국립대 조교는 공무원 신분인 데다 급여도 괜찮은 편이라는 점에서 다행이고, 바쁜 업무 때문에 회계사 시험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다는 점이 불행이었다.
7월 초, 공식적인 조교 발령은 나진 않았지만, 선임 조교의 미국유학으로 공석이 된 조교 자리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외국논문이나 전공서적의 번역, 논문 데이터의 통계처리, 학부 수업에서의 문제풀이 등 교수님들의 강의와 연구를 보조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조교라는 직책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은 곧 학계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업무 또한 방대하여 조교 사무실에서 회계사 수험서를 펴 놓고 사적인 공부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해 8월, 주변 사람들 몰래 응시한 회계사 2차 시험 결과, 경영학에서 과락을 맞았다. 워낙 범위가 넓은 과목인 데다가, 회계학과는 거리가 먼 인사관리 분야에서 배점이 큰 문제가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학부 때부터 같이 공부해 온 멤버 대부분이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이번에도 나는 선택받지 못했다.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정식으로 조교 임명을 받았다. 학기 초, 정신없이 바쁜 상황에서 후딱 한 달이 지나가고 생애 첫 월급을 받았다. 22만 원 남짓한 현금이 든 봉투를 받으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요즘 화폐로 환산하면 220만 원은 족히 되리라. 사촌 형님 내외분 내복 값 5만 원, 내 생활비 7만 원을 제외한 10만 원을 어머니께 송금했다. 훗날 여동생들이 전한 바에 의하면 어머니는 이 돈을 받아 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피땀으로 얼룩지고 한이 맺힌 돈이었다.
이차함수에서 기울기가 변하는 변곡점처럼, 인생살이에도 전환점이 있다. 함수의 변곡점에서 기울기가 양(+)과 음(-)으로 변하듯, 생의 전환점에서도 우리의 삶이 긍정적(+), 부정적(-)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학원 2학기가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하숙비라는 만만찮은 지출이 없어진 반면, 월급이라는 수입이 생기게 되었으니 양의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기가 변하는 변곡점을 맞이한 것이다. 경제적 여유는 심리적 안정을 가져와 이후의 대학원 과정은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