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푸 Apr 06. 2023

사람을 피해 시골로 도망쳤다.

학창 시절엔 반장과 부반장, 학생회를 도맡아 했다. 학창 시절엔 분명히 나는 외향형이었는데,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어 점점 작아지면서 마음의 크기도 작아졌나보다.

나는 이제 사람이 싫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우물 안 개구리. 뭐 그딴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나는 사람이 싫었다. 


그럼에도 어쩌다 보니 결혼을 했고, 남편과 7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 근처에서 살았지만 좋은 기회에 시골로 내려갈 수 있었다. (좋은 기회란? 남편의 시골로의 이직) 시골로의 이직이 남편에게는 큰 도전이었고, 나에게는 큰 도피처가 되었다.


시골로 내려가면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을테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거리를 핑계로 만나지 않을 수 있겠구나 하며 말이다. 시골 행은 나에게 잭팟과도 같았다. 


시골로 내려가기 전 인터넷에서 시골살이에 대해 검색해봤을때, 100이면 100 시골에선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했다. 텃세며 마을발전기금이며 외지인들을 배척한다는 정보들 속에서 덜컥 겁이 났다. 겁을 냈던 처음과 달리 우리는 2년간 시골 읍내 빌라에서 살았다. 읍내에 있던 빌라여서 그런지 적당히 한적했고, 적당히 익명성이 보장됐다. 살아보니 시골도 다 사람사는 곳이더라. 그래서 2년 후 우리는 시골 주택을 구입해 슈퍼하나 없고 가구수도 몇개 없는 정말 시골로 들어왔다. (도시 사람들이 보면 시골 읍내나 내가 말하는 '정말 시골'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만.) 


지난 겨울, 눈이 참 많이 왔다.
상업시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동네.

처음 이 마을에 이사온 주에 '이사떡'을 돌렸다. 남편은 이사날 이사짐을 나르는 아저씨들을 도와줘야하나 말아야하나 계속 우왕좌왕 하길래 "저 분들은 프로라서 우리가 도와드리는게 더 불편할 수 있어(게다가 저분들의 노동력을 우리는 몇백만원에 샀잖아)"하며 "이사떡이나 돌리자, 이사떡 좀 인터넷에서 사줘"라며 남편에게 주문을 넣었다. 남편이 구입한 이사떡은 내가 생각하던 네모난 판으로 된 이사떡이 아니라 결혼식 답례용으로 만들어진 주먹만한 시루떡이어서 배송온 날 조금 놀랐지만, 뭐 어떠랴 요즘 시대에 이사떡 돌리는 사람이 있겠어? 하며 호기롭게 동네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동네 어르신들과 안면을 텄다.


그 이후로 동네에 젊은이들이 이사와서 좋다. 는 말을 동네 산책할 때마다 들었고, 때론 키운 채소들을 주시기도 했다. 


사람이 싫어 시골로 이사를 왔는데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됐고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방향이 흘러갔지만 그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싫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


그동안 조건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하며 손해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시골에 와서 살아보니 서울에서 내려온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인 나를 조건 없이 환영해주고, 열심히 키운 채소들을 나눠주시던 동네 어르신들을 보며 나는 사람이 싫었던게 아니라 사람에게 상처 받기 싫어서 사람을 피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조건 없는 호의들 덕분에 나는 그동안 가졌던 '사람이 싫어'라는 생각이 '사람은 좋아하지만 상처 받는게 무서워'였다는 진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적당한 방어기제는 나를 지키는 수단이었지만, 오히려 나를 나에게 감추는 두꺼운 벽이 되기도 했다. 


이 참에, 그 벽 한번 허물어볼까보다. 



youtube.

 https://www.youtube.com/@goeun


instagram.

https://www.instagram.com/im_goeunny/



매거진의 이전글 30대에 불치병 환자가 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