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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푸 Jan 10. 2023

서울을 떠나다. 나는 왜 30대에 시골에 내려갔을까_1

-서울 9평 원룸에서 11평 투룸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30년 가까이 도시에서만 자랐다.

언제나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자랐고, 출퇴근시간 지옥철은 나에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랫동안 산 동네는 20년 가까이 살았던 송파구.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독립을 했고 보증금 1000에 월세 50만 원짜리 오래된 원룸이 나의 서울에서의 첫 집이 됐다.

그러다 결혼을 했고, 남편 될 사람과 나는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라 우리의 신혼집은 내가 살고 있던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짜리 9평 원룸에서 시작 됐다.


보증금 1000/50 9평의 오래된 원룸


  그곳에서 2년 계약기간 동안 꽉꽉 채워 살면서 월세보단 전세가 낫겠다 싶어 전셋집을 구하려는데 우리가 가진 돈으로 서울에 전셋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처음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지역은 우리가 살고 있던 동네에서부터였는데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방문한 부동산에 쭈뼛쭈뼛 들어가 '혹시 1억 2천만 원 전셋집이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면 중개사는 어이없다는 듯 '이 지역에서는 그 돈으로 집 못 구해요' 라며 우리를 부동산 문 앞에 세워두고 이야기하곤 했다. 마치 '내 소중한 시간을 너희들에게 쓸 생각은 없어'라고 이야기하듯 말이다.

  그러면서 점점 외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떤 주말엔 광진구로 어떤 주말엔 중랑구로 어떤 주말엔 노원구로 그러다 도봉구로 넘어왔다.


드디어 식탁을 놓을 수 있는 곳이 생겼다
강아지와 함께 항상 산책하던 공원


  서울의 끝 아무런 연고도 없던 도봉구였다. 그래도 이곳은 문으로 나눈 방이 있고, 더 이상 좌식 식탁을 펴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을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있던 자그만 빌라였다.

  조금은 특이한 화법을 가지고 있던 집주인은 이전 세입자가 청약에 당첨되어 나갔다며 우리에게도 이 집에서 살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이야기했다. 실제로 도봉구는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추억을 선사하던 동네였다.

이사를 하고 남편과 손잡고 동네 한 바퀴를 걸을 땐 '조금 으스스하고 옛날 건물들이 정말 많다, 밤에 돌아다니기엔 조금 무섭겠다'며 밤에 돌아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나였는데, 가난한 우리 부부에겐 저렴하게 장을 볼 수 있는 시장이 가깝게 있어 좋았고, 가깝게 하천이 있어서 강아지와 산책하기도 좋았다.

  도봉산이 가까운 동네라 등산도 할 수 있었고(등산은 사는 동안 한 번밖에 안 했다는 게 문제), 공원도 많아서 돈 들이지 않고 여가생활을 보내기 안성맞춤이었다.


도봉산 페스티벌
동네 시장

  특히 동네 시장이 가깝게 있어 새벽에 가락시장에서 떼온 채소들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파는 가게가 많았다.

오전에 가야 질 좋은 채소들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는데 천 원에 오이 4개, 천 원에 상추 한 다발, 천 원에....... 만원만 가져가면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서 돌아올 수 있는 사랑스러운 동네였다.


  지하철역이 멀리 있어 이사하는 날엔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그 멀었던 지하철역 덕분에 강아지와 함께 몰래 남편 퇴근길을 마중 나가기도 했고, 지하철역에서 우리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있던 식당에서 음식을 싸와 우리만의 파티를 하기도 했다. (a.k.a 어푸어푸 데이)


그렇게 도봉구에서 2년 가까이 살았다.

그렇게 또다시 전셋집을 구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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