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도 있기 마련이지.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습니다. 특정인물이나 사건과 관계 없음을 밝힙니다.
“파인애플 대리님! 큰일 났어요.”
멘탈 약한 나를 쪼그라들게 하는 ’큰일 났어요.‘ 수화기를 든 손에 힘이 빡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왜 또!
“바나나 과장님, 무슨 일이세요?”
“파인애플 대리님, 10분 뒤에 저희 과일가동률 회의잖아요. 그런데 대리님 통조림 제품 잘릴거 같아요.”
“잘려요? 왜요?”
“자세히 설명드리기 곤란한데요, 대비 좀 하셔야겠어요. 이따가 회의에서 발표 좀 하세요, 파인애플 대리님 제품이 잘리면 안된다고요.”
“네?”
바나나 과장은 급한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 제품이 왜 잘려? 그리고 무슨 발표를 하라는 거지? 그리고 내 제품이 잘리면 난 거래선에 어떻게 설명을 해?
영업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다. 새로 옮긴 팀은 나에게 비우호적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작은 제품 하나를 담당하라고 했다. 통조림을 파는 일이었다. 이미 적자를 본 지 여러 해 된 제품이었다. 내가 제품을 맡은 지 겨우 한 달이 되었을 때 팀장은 왜 적자가 나냐며 나를 다그쳤다.
“파인애플 대리, 맡고 있는 통조림 제품 다음 달에도 적자 예상인가?”
“어… 네, 일단 당장은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흑자 전환 할 수 있지? 계획 좀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알겠습니다.”
“내가 맡기 전 1년 동안 적자였던 제품을 나보고 어떡하라고요.”라는 말이 목구멍에 차올랐다. 그러나 꾹꾹 참았다. 아직 공부를 해야 하는 단계였다. 통조림에 대해 공부하고, 통조림을 파는 거래선들을 만나고, 통조림이 어떻게 생산되어 판매되는지 파악해야 했다.
“사장님, 이번 달에는 통조림 몇 톤 가져가실 예정인가요?”
“공장장님, 이번 달에는 통조림 요만큼 생산 가능한가요?”
”재무팀이죠? 저 통조림 원가구조에 대해 궁금해서 전화드렸어요…“
한 겹 한 겹 경험치를 쌓아올렸다. 전혀 모르던 제품이었으므로 다방면에 전화를 걸었고 자료를 받아 공부했다. 통조림은 간단해 보이는 제품이었지만 나름의 특수성이 있는 제품이었다. 연구, 생산, 재고관리, 판매, 시장조사… 힘들었지만 내가 제품 하나를 온전히
책임진다고 생각하면 재미도 있었다. 공장에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새로 통조림 영업을 맡게 된 파인애플입니다. 통조림 공장 생산과정 관련해서 저 좀 교육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뭐 그러죠. 공장에 대리 한 명 서울로 출장 보내겠습니다.“
통조림 공장에서 생산을 맡고있던 엔지니어가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회의실을 예약해 몇 시간 동안 설명을 들었다. 어떻게 원료를 들어와서 생산을 하는지, 공정 단계는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생산 조건을 조절해 다른 제품들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파인애플 대리님, 저희 공정은 아주 예민해서요, 잘못 자칫하면 폭발 위험성도 커요. 그래서 적자가 좀 나기는 해도 가동률을 낮추지는 않아요.“
”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얘가 위험물질이라 그런가요?“
”네 맞아요. 어쩌구저쩌구 블라블라 때문에 그래요.“
”(잘 모르겠다.) 아 네네, 이 공장을 끄면 큰일 날 수 있군요. 잘 알겠습니다.“
세 달이 지났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내가 맡은 제품이 조금씩 이익을 보기 시작했다. 만년 적자 제품이었던 통조림이 플러스 영업이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통조림 담당자인 내 어깨가 올라갔다. 다같이 회의를 할 때 제품별 예상 이익을 표로 만들어 띄우면 내 입꼬리는 배시시 올라갔다. 내 제품만 플러스야. 다른 제품은 다 시뻘건 적자인데.
”파인애플 대리님, 담당하시는 제품이 적자에서 흑자 전환했네요? 이유가 뭘까요?“
”하하 제가 잘해서 그렇죠~“
이제는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흑자 규모가 작아도 어쨌든 그 의미는 컸다. 빨간 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바나나 과장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통조림 공장을 끄고 감산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뭐지? 왜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한 제품을 감산을 한다는 거야? 나는 거래선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해? 지난 달에 가격 인상까지 했는데. 아니 그것보다,
분명히 공장에서 위험물질이라 가동률 조정 안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끌 수 있다는 거지?
알아볼 시간이 없었다. 회의가 10분 뒤였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일단 노트를 챙겨 회의실로 올라갔다. 큰 회의실에 모든 제품 영업담당자, 엔지니어들, 기획 담당자들이 모여있었다. 줌으로 공장에서 연결되어 있는 이들 까지 수십명이었다. 임원들도 여럿 앉아 있었다. 바나나 과장이 회의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과일 가동률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단은…파인애플 대리님의 통조림 제품 관련해서요, 저희가 수익성을 계산해봤습니다. 통조림을 끄고, 그 원료로 밀키트 제품을 더 생산하는게 이익일 것 같아요. 통조림 생산을 15일 동안 껐으면 합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제품을 왜 감산해?
”파인애플 대리님, 뭐 관련해서 하실 말 있으신가요?“
”아…그…“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이런 내가 싫다. 왜 이럴 때 내 목소리는 떨려나올까? 그리고 그 떨린 목소리가 다시 내 귀에 들어간다. 모두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내 자신의 모습에 가슴은 더 두근거린다.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될 전조증상이다.
”거래선이랑 얘기가 되어있는 물량이 있어서요…그렇게 갑작스럽게는 힘듭니다. 그리고…이제 막 적자에서 흑자 전환 시작한 제품인데…게다가…“
심장은 쿵쾅거리고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말들이 내 입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위험물질이기 때문에 공장을 그렇게 막 끄면 위험합니다. 안 될 것 같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을 채웠다. 그 사이로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바나나 과장 옆에 앉아있던 오이 과장이었다. 얼굴이 길쭉해서는 모두에게 무례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회의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더니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 제품이 위험물질이라 공장 가동률 조정이 힘들다고요?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러시는 거 같은데요. 제가 예전에 다른 회사에서 통조림 공장 돌려봤는데요, 전혀 문제 없습니다.“
내 입이 턱 막혔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회의석상에서 이렇게 휘말리다니.
“아무리 그렇다고.. 막 그렇게 통보하시면..”
“(오이 과장) 가동률 조정 제가 다 예전에 해봤고요. 문제 없습니다.”
“(왠지 빠직) 바나나 과장님, 너무 급작스러운 것 같습니다..제 제품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잘리는 건 곤란합니다.”
그리고,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통조림 공장 관련자 그 누구도 이 논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통조림 공장에서 나에게 사실을 과장해서 말했던 것이다.
(위험물질이라 공장 가동 중단이 조심스러울 뿐,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오이 과장의 말이 맞았다.)
신생 영업 담당자였던 나는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잠시 오이 과장과 나의 논쟁을 지켜보던 바나나 과장이 말했다.
“그럼 통조림 제품은 15일간 감산하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복잡한 심정으로 수첩을 챙겨서 일어났다. 같은 팀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 때만큼 참담했던 적이 없었다. 과장된 정보를 듣고 그걸 회의석상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나. 그걸 지적하며 자신의 생산 전문성을 과시한 오이 과장. 그나마 귀뜸해준 바나나 과장에게 화를 낸 나. 나는 완벽히 당했다. 완벽히.
회의실에서 나와 다같이 엘리베이터를 우르르 탔다. 이제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이고 나발이고 그냥 어디 가서 누워 있고 싶었다.
“그…파인애플 대리님, 낙지볶음 먹으러 가실래요?”
“아…네? 낙지볶음이요?”
같은 팀 유자씨였다. 그녀는 팀의 경리였다. 그러나 야무진 능력을 인정받아 조금씩 조금씩 제품들의 운영도 많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내가 팀에 왔을 때 나를 어렵고 불편해 했다. 업무에 꼭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말을 아꼈다. 그런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낙지볶음을 권했다. 입맛이 없었지만 왠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운 게 땡기기도 했다.
“아…그럴까요. 낙지볶음 먹으러 가요.”
그녀와 둘이서 회사 앞 유명한 낙지맛집에 갔다. 그녀는 나에게 묻지 않고 제일 매운 맛으로 주문했다. 사이다도 두 개 주문했다. 낙지볶음은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매웠다. 콩나물과 낙지를 밥과 함께 슥슥 비볐다. 콩나물 국을 들이키며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입맛이 하나도 없을 때 조차 낙지볶음은 맛있었다. 맵다고 혀를 내두르면서도 우리는 자꾸 자꾸 숟가락질을 했다. 유자씨는 내가 사이다를 연거푸 들이마시는 것을 보며 웃었다. 이상하게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식당에서 나와 커피 한 잔씩 들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평소와는 달리 달디단 카라멜 라떼를 들이키니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이 조금 몽글몽글 해졌다. 나는 메신저 창을 켰다.
“유자씨, 매운 거 먹으니까 정말 좋네요. 다음에 그 낙지집 또 가요.”
“파인애플 대리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네 좋아요 대리님~~”
밝은 그녀의 대답을 확인하고 메신저 창을 껐다. 그리고, 나는 메신저에서 바나나 과장을 확인했다. 그의 메신저 창이 초록빛으로 들어왔다. 바나나 과장도 이제 점심 식사 후 자리에 돌아온 듯 했다. 나는 그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과장님, 아까 회의에서 제가 너무 심하게 말씀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제 제품이 감산된다고 하니 순간적으로 그랬나봐요.”
그는 잠시 답이 없었다. 뭔가를 썼다 지웠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엑셀 창을 띄워놓고 다른 업무를 시작했다. 잠시 후 나의 메신저 창이 깜빡깜빡했다. 바나나 과장이었다.
“아닙니다. 영업사원이 담당하는 제품을 열심히 관리하는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그럴 수 있지요. 수고하세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메신저 창을 껐다. 이제는 회의에서 결정된 통조림 감산을 위해 업무 처리에 집중해야 했다. 엑셀 창을 열었다. 감산으로 조정될 물량을 대략 계산했다. 전화를 걸 공장 담당자와 거래선 사장님들의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낙지볶음과 카라멜 라떼가 나에게 남은 오후에도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헛기침을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파인애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