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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모모씨 Aug 16. 2023

요즘의 저는

이따금씩 궁금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나처럼 생각이 많은지,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지레 겁을 먹고 걱정을 하는 지, 수 많은 불행의 시나리오를 쓰며 괴로워하는 지. 이미 지나간 일을, 나 빼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과거를 붙잡고 혼자서 씨름하는 지. 가끔 삶이 고통이라고 느끼는 지 말이다. 아니면 정말 내가 이상한 건지. 나만 괴이한 건지. 난 보편적이지 않은 건지.


걷잡을 수 없이 생각은 많아지고 마음은 한 없이 깊어질 때, 더 이상 내가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끼면 펜을 들거나 키보드를 두드렸다. 새벽이건, 낮이건, 밤이건, 내 방이건, 모두가 잠에 든 집의 부엌이건, 카페건. 그런 순간은 제 멋대로 왔다. 날 배려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냥 쓰고 썼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감정과 상념을 문장으로 정리하려 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질서를 부여해봤다. 그리고는 울었다. 그 때마다 내 눈이 얼마나 부을 수 있는지, 그래서 애교살이 얼마나 두꺼워질 수 있는 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또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사람이 북적이는 주말 낮의 스타벅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끝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 냅킨을 한없이 쌓아 올린 채 울었다. 펑펑. 소리를 안 내려고 입술은 꽉 깨문채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울면서 썼다. 나는 나를 버텨내야만 했다. 그 때의 내가 글을 쓰는 업을 꿈 꾼 건 당연했다. 쓰지 않고는 살아낼 방도가 요원해 보였다. 살려면 써야 했다.


날이 갈수록 서서히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시간이 절로 해결해준다는 마법을 믿진 않는다. 단지 그 시간 속에서 씩씩해진 내가 해낸 일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울어댔던 나는 그 눈물만큼, 울면서 나의 고통과 불안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 써내려간 글만큼 꽤 단단해졌다. 덕분에 글과는 거리가 먼 영역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때때로 밀려오는 우울감도 통제할 수 있을 때가 잦아졌다. 고통과 불안의 강도도 잦아들었다. 삶을 개선하려면 뭘 해야하는지 조금씩 알 듯도 했다. 끄적이는 글의 양도 당연히 적어졌다. 인생이 보다 심플해졌달까. 가볍게 털어낼 수 있는 생각의 회로를 많이 확보해둔 덕이다. 이는 남들의 생각을 적어놓은 글로부터 얻었다. 생각을 줄이기 위한 생각을 기록해놓고 외워뒀다.


그 때는 숨을 내뱉을 때마다 한숨이 되는 것만 같았다. 늘 내쉬는 한 숨이 어찌나 버거운지. 매일 걷는 한 걸음은 왜 그리도 무거운지. 그런데도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문제는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거웠던 그 때가 가끔, 아주 가끔은 그립다. 우울감이, 그리고 그 우울감으로 가득찬 내가 울면서 써내려간 글들이. 이제는 그렇게 우울할 때도 드물고, 글도 단번에 확 써지지를 않는다. 칼럼이나 책이나 뉴스, 그 어떤 종류의 활자를 읽어도 마음이 부풀지 않는다. 그렇구나 하고 만다. 쓰고 싶은 글의 소재가 쉬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교환일기를 쓰는 요즘 옛날 일기장과 블로그를 들춰보고 있는 이유다. 과거의 내가 끄적여놨던 상념과 고민들을 훔쳐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 때의 나는 몰랐을 것이다. 몇 년 뒤의 내가 갑자기 교환일기를 시작하고, 그 글감을 울면서 쓴 글로부터 찾고 있게 될 지. 알았다면 그 때 좀 덜 슬퍼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덜 슬퍼했으면 그만큼 많고 깊은 생각을 못했겠다. 그래서일까, 요즘 유독 과거의 내게 조금 고맙고 많이 미안하다. 가능하다면 그냥 좀 토닥여 주고 싶다. 괜찮다고, 괜찮아진다고.


그렇다고 과거의 나로 돌아갈 것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난 지금이 좋다.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 글로 쓸만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과거의 것들을 빌려 쓰고 있지만, 그래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글감들로 연명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글을 매주 쓰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덜 우울하고 더 씩씩해졌는데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살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면서 살아있다고 느끼게 돼서 좋다. 글을 다 쓰고 카페에서 나와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걸어 가는 길이, 그 시간이 참 좋다. 글을 어떻게 고치면 좋을 지에 관한 생각이 떠오를 땐 더욱 더. 게다가 나의 상념과 고민을 담은 글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들의 맘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읽을 수도 있다. 글자가 사람간 온기를 전하는 데 아주 좋은 수단임을 매번 깨닫고 있다. 요즘 나의 행복은 당신과 당신이 쓴 글자 덕분이다.


물론 언제라도 다시 울면서 혼자 볼 일기를 끄적일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어쩌면 글감이 다 떨어졌다며 교환일기를 갑자기 때려치울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다지 두렵지 않다. 예전처럼 지레 겁을 먹고 걱정하진 않는다.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 때의 나에서 조금 더 씩씩해졌단 걸 안다. 앞으로 더 씩씩해지리라는 것도. 우울한 나로 회귀하는 순간이 예고 없이 온다 하더라도, 잘 이겨낼 테다. 그리고 우선 지금은 좋으니까. 사서 걱정을 하기 보단 지금 감정에 충실하겠다. 마음이 천 년 갈지 만 년 갈지, 알 바 인가.


안팎으로 나를 동요하게 하는 요인들은 여전히 수 없이 많지만, 요즘은 글을 쓰고 있으면 물살이 잔잔해지고 사고가 말랑해지는 것만 같다. 울지도 않는다! 휴지를 쌓아둔 채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예전보다 글이야 잘 안 써지지만 글을 쓸 때 기분은 더 좋은 이유다.


요즘 난 그렇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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