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를 산다는 것
창업 전까지 나는 오르골을 한 번도 내 돈 주고 사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 이유를 몰랐다. 손바닥만 한 상자에서 나오는 몇 개의 단조로운 멜로디가 뭐가 그리 특별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마트폰 하나면 세상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굳이? 그런데 창업을 하고 오르골을 팔기 시작하면서,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계와 마주했다.
전시회 첫날이었다. 부스를 찾아온 한 고객님에게 피노키오 OST 오르골을 들려드렸다. 첫 음이 흘러나오자마자 그분의 눈이 반짝였다. "아, 이거 디즈니 도입부에 나오는 그 음악이네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그저 '피노키오 테마곡'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분은 정확히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인지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심지어 작곡가 이름까지. 그날 이후로 만난 오르골 콜렉터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내가 몰랐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이 곡이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흘렀는지, 그때 주인공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작곡가가 어떤 의도로 이 멜로디를 만들었는지. 나는 판매자였지만, 그들이야말로 진짜 전문가였다.
그들을 보면서 문득 친구 하나가 생각났다. 핑크 립스틱을 유독 좋아해서 화장대에 비슷해 보이는 핑크 립스틱이 스무 개도 넘는 친구. 나는 그때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비슷하게 생겼는데 왜 이렇게 많이 사?" 하지만 이제 안다. 그 친구에게 각각의 립스틱은 모두 다른 이야기였다. 첫 데이트 때 발랐던 색, 면접 때 용기를 준 색, 실연당한 날 위로가 되어준 색. 오르골 콜렉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엔 비슷한 오르골들이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추억의 조각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들었던 자장가, 첫사랑과 함께 본 영화의 OST,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어준 멜로디. 그들은 단순히 음악을 모으는 게 아니라, 삶의 순간들을 모으고 있었다.
오르골을 공부하면서 문득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오르페우스. 그리스 신화 속 음유시인. 그의 노래는 돌도 울렸고, 짐승들도 길들였으며, 심지어 죽음의 신까지 감동시켰다고 했다. 혹시 오르골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왔을까? 어원은 다를지 몰라도, 그 정신만큼은 닮아있는 것 같았다. 작은 상자 안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확신했다. 이것은 현대판 오르페우스의 마법이다. 오르골 소리는 정말 특별하다. 디지털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장인이 한 땀 한 땀 새긴 금속 판이 만들어내는 깊고 따뜻한 울림. 마치 누군가의 진심이 소리가 되어 전해지는 것 같다.
피노키오 오르골을 들려드렸던 그 고객님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첫 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어린아이처럼 환해진 얼굴.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분이 사고 싶어 하는 건 오르골이 아니었다. 디즈니가 약속했던 그 모든 것들이었다.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 선량한 마음이 보상받는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는 세상.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유토피아. 그 순간 나는 상상했다. 언젠가 나도 디즈니처럼, 꿈을 파는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까? 제품이 아니라 희망을,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그런 브랜드를.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굳이 오르골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 안다.
그들이 진짜 사고 있는 건 음악이 아니다. 그들이 사고 있는 건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여행표다.
스마트폰 속 음악은 언제든 멈출 수 있지만, 오르골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온전히 그 순간에 머물 수 있다. 디지털이 줄 수 없는 체온을 사고 있다. 차가운 스크린이 아니라 따뜻한 나무, 정교한 금속의 감촉. 손으로 만지고, 태엽을 돌리고, 뚜껑을 여는 그 모든 행위가 주는 물리적 위안. 그리고 장인의 마음이 담긴 정성을 사고 있다.
대량생산된 디지털 음원이 아니라, 누군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든 수작업의 온기.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정성을 소유하는 기쁨. 무엇보다 동화를 현실로 가져오는 마법을 사고 있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나 봤던 오르골을 실제로 소유할 수 있다는 설렘. 꿈과 현실 사이의 다리.
창업을 하면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다. 사람은 제품보다 메시지를 산다. 그 작은 오르골 안에는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누군가의 꿈과 그리움, 사랑과 추억이 들어있다. 콜렉터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오르골을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감정, 새로운 위안을 담은 작은 보물상자를 찾아서.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내가하려고 하는일은 누군가에게 행복한 순간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도 누군가는 작은 메세지 하나에 큰 꿈을 담아 집으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사람은 의도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