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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Mar 23. 2024

부르스 코헨의 그림

내가 느낀 이미


이 그림을 Galerie Choi 님 타임라인에서 처음 보고는 그냥 지나쳤는데, 그때도 뭔가 느낌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시 보면서 이 그림을 두고 하고픈 말이 떠올랐다. 이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 느낌이 떠오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예술 작품의 특징이 바로 '감동' 즉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느냐로 판단하는데, 이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현대 예술을 판단하는 미학적 기준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격동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물론 어떤 예술 작품을 보고, 각자의 내면에서 격동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사람에 따라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의 전인격을 알 수 있다. 작품 하나를 이해하려면 무수히 많은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 쌓여야 하고, 감정과 이론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작품 앞에서 미학 이론을 떠올리기 보다,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예술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전인격의 총체성을 물리적 형태로 현현(顯顯)하는데, 관객은 이 작품을 보면서 예술가의 의도를 얼마나 절절하게 느끼느냐에 따라 작품 뿐아니라 예술가와도 교감하게 된다.


아래 그림을 보면서 떠오른 작가가 둘인데, 미국 작가 에드워드 호퍼와 벨기에 작가 르네 마그리트다. 아래 그림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섞어놓은 느낌이다. 이 느낌은 먼저 감정으로 느끼고, 다음으로 작가가 떠오르는 경우인데, 복잡미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아래 그림을 그린 작가는 브루스 코헨으로 미국 작가다. 그는 1953년생으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로,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팔리는 유명 작가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그림을 보면, 직선의 이미지는 냉정하다. 도시 건물의 차가운 벽과 직선으로 떨어지는 창문과 문이 모더니즘 요소로 보이지만, 왼쪽 창에서 비껴 들어오는 빛이 오른쪽의 약간 열린 문으로 비치면서, 살짝 열린 문 뒤의 어둠을 더 깊게 만든다.


이건 르네 마그리트가 평생 추구했던 '쉬르 레알리즘(초현실주의)' 요소를 강하게 드러낸다. 열린 문 뒤의 어둠은 현실에서 초현실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고, 문 뒤의 세계가 알 수 없는 세계, 미지의 세계, 정체를 알 수 없는 세계(미래)를 상징한다.


무채색의 방에 녹색 테이블보, 진파랑 의자, 노란 수선화가 꽃병에 놓여 있는데, 이 색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짙은 외로움을 느끼는 색과 같고, 진파랑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보이는 초현실 공간과 사물에서 보이는 색으로 보인다.


언뜻 보면 창문에서 들어오는 밝고 환한 빛과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노란 수선화, 진파랑 의자의 서로 다른 두 색깔로 방의 분위기가 밝아보이는 듯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방은 쓸쓸하고, 깊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건 열린 문 뒤의 깊은 어둠이 방을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어서 더욱 우울하고 외로운 분위기다. 햇빛의 각도를 보면, 계절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선화가 피어 있는 계절이라고 할 때, 마침 지금과 같은 3월 말에서 4월 중순까지의 시기다. 즉, 봄이 한창일 때의 오전이다. 저 창문의 위치가 서향이라면 저런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각도이기 때문에 창문의 위치는 동쪽 또는 남쪽으로 볼 수 있는데,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걸로 보면 동쪽일 확률이 높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하고 깨끗한 방이지만, 테이블보는 흐트러져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직각과 직선을 이루는 가운데 테이블보는 헝클어져 있는데, 테이블보 아래 왼쪽 구석은 짙은 어둠에 가려 있다.


테이블보 아래의 어둠과 문틈 너머의 어둠은 이 방의 성격을 규정한다. 관객은 테이블보 위의 밝고 환한 노란 수선화를 보고, 이 방이 밝고 화사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진파랑 의자는 자칫 밝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의자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파랑과 밝은 파랑으로 나뉜다. 이건 '의식의 분열'을 드러낸다. 따라서 테이블 아래의 어둠과 문 뒤의 어둠은 무의식의 세계다.


무의식의 세계는 의식 세계로 들어오려 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인간의 이성으로, 매우 불안하다. 빛이 얼마나 더 오래, 많이 머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의 밝은 면을 상징하는 노란 수선화는 빛이 사라지면 곧바로 시들게 된다. 빛이 사라지면 문 뒤의 어둠이 슬며시 방을 가득 채우고, 어둠이, 무의식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게 된다.


이 작품은 처음 봤을 때, 문득 어떤 느낌이 들었고, 다시 찬찬히 보면서 하고픈 말이 많은 작품이라는 걸 느꼈다. 에드워드 호퍼의 진하고 깊은 외로움, 그건 지극히 도회적 소외를 의미한다. 


여기에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 공간이 인간의 무의식을 상징하면서 현대인이 갖는 단절, 고독, 외로움, 자신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을 담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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