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 가난이 빼앗지 못한 사랑의 체온

추울수록 더 뜨거워지는

by 하루살이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시 속엔 가난한 삶이지만 여전히 인간다운 감정과 희망을 간직한 사람이 그려진다. 하지만, 화자가 내뱉는 인간다움을 들어주는 이는 시 속에 그려지지 않아 슬픈 독백에 그칠 뿐이다.


그가 겪는 외로움은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 한겨울 밤거리의 추위로 나타나고, 이내 두려움과 그리움으로 확장된다.


외로움은 현 시점에서 느끼는 감정이었다면, 두려움과 그리움은 각각 미래와 과거에 강하게 연관된 감정이라는 점에서 인상깊다. 현재의 쓸쓸한 외로움으로부터 유체이탈해 도망치듯, 그의 감정은 미래와 과거로 치닫는다.


두려움은 호각소리와 탱크 소리로 형상화되고, 그리움은 감나무로 연상되는 집과 어머니로 형상화되고, 화자는 점차 외로운 현재와 멀어지려고 한다.


지금의 현실에서 도망치려던 그를 다시 붙잡은 건 ‘네 입술의 뜨거움’이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이 화자를 다시 현실에 붙잡아둔다. 그는 가난하기에 사랑을 버려야 하고 그래서 외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 돌아와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현실을 마주한다.




저에게 시는 가난 때문에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도피하려고 하지만, 결국 사랑의 힘으로 이를 마주한다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그래서인지, 그리스 신화 속 에로스(사랑)의 탄생이 떠오릅니다. 에로스는 가난의 여신 페니아와 풍요의 신 포로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요. 이에 대해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와의 대화를 통해 사랑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어머니인 페니아로부터 가난과 결핍을, 아버지인 포로스로부터 풍요와 계략을 이어받아서 에로스는 무언가를 갈망하며, 그 결핍을 채우기 이해 지혜와 계략을 동원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런 에로스의 본질에 대해 사랑이 결핍에서 비롯된 무언가를 추구하는 욕망이며,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흙 속에서 핀 연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어쩌면, 새파란 달빛이 쏟아지는 눈 쌓인 골목길에서 네 숨결이 더 뜨거운 것 아닐까요?

앞으로도 괴로울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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