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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서석화 May 14. 2020

어버이날, 카네이션은 여전히 붉고 예쁜데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잊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자꾸 가물가물 하다. 그래서 떠올리려면 집중을 해야 한다. 숨소리를 낮추고 몸의 모든 동작을 멈추며 시선도 한 곳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눈을 감고 숨조차도 참을 수 있는 한도까지 참아야 한다. 그러면 들린다. 말투와 잘 쓰는 단어와, 나의 불안을 만져주던 따뜻한 숨소리. 그리고 가장 생생해서 떠올릴 때마다 울게 하는 말, 미안함과 고마움과 안쓰러움까지 쟁여 넣은 그 말, 사랑해... 까지도.      


어머니 목소리다. 사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목소리! 그 목소리가 자꾸 멀어져 간다. 모습이 잊힐 것만 겁냈었는데 녹고 있는 눈사람처럼 작아지고 사라지는 목소리. 생각지도 못한 이별이 또 하나 보태진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병석에 계셨던 십육 년 동안, 생과 사를 가르는 이별은 언제든 우리 모녀에게 들이닥칠 수 있는 통보된 시간이었다. 의사는 지치지도 않고 십육 년을 ‘준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처음엔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억지를 부렸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내가 안 보내겠다는데 누가, 무슨 자격으로 내 엄마를 데려갈 수 있냐며 의사 앞에서 소리도 질렀다. 그러다가 몇 차례나 중환자실을 오가고 가슴에 인공심장박동기를 넣는 시술을 거듭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환자 보호자가 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바로 눈앞에서 똬리를 튼 세상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 나는 보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온몸이 눈이 되어 어머니의 그림자까지도 샅샅이 담았다. 오늘, 지금 보고 있는 저 모습이 세상에서 내가 보는 어머니 마지막 모습이면 어쩌나 하는 상상은 불길했지만 거둬지지 않았다. 때문에 볼 때마다 나로선 절박한 상봉이었다.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순간에 백이면 백 번 다시 들어가 어머니 침대 곁을 돌며 서성인 것도 그래서였다. 어머니 얼굴을 만지고 손을 만지면서 나는 초능력의 힘으로 내 기억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어머니의 살갗 감촉을 저장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 이마의 파리한 실핏줄까지도 기억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정상 체온보다 늘 일이 도쯤 낮아 내 걱정의 온도를 높이던 어머니의 삼십오 도 언저리의 체온도, 지금 안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어머니를 걱정해 병문안 왔던 사람들이 돌아갈 땐 외려 자신들이 위로받고 간다며 두고두고 말하던 어머니의 무구한 미소도 그대로 그릴 수 있다. 평생 무슨 경건한 의식인 양 바싹 깎아댔던 손톱과 발톱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어머니에게 이 생에서 마지막 해드린 것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 어머니의 손발톱을 깎아 드린 일이었다. 대부분의 그 연세 어른들처럼 무좀으로 갈라지거나 회색빛으로 두꺼워지지 않고, 아기처럼 고운 분홍 빛깔의 얇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발톱. 나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슬펐다. 나중에 어머니 세상 떠나시면 어느 한 군데 그립지 않을 곳이 없을 테지만, 나는 빨간 속살까지 보이도록 정갈하게 깎인 이 손톱이 그리워서도 많이 울겠구나... 그날도 그런 생각에 뜨거운 숨이 목으로 자꾸 넘어갔다.      


세상엔 힘든 일도 많고 외로울 수 있는 상황도 열 사람이면 열 개일만큼 다양할 것이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나는 외로움의 극한까지 끌려갔다. 나는 무남독녀였다. 이건 슬픔이든 걱정이든 함께 하거나 나눌 혈육 하나 없이, 오로지 내 슬픔이요 내 걱정이라는 걸 뜻한다. 나는 투사가 되었다. 아니 되어야 했다. 울어서도 안 되고 불안과 무서움을 들켜서도 안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있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사실은 아픈 어머니가 십육 년 내내 진짜 투사였음을! 그것이 얼마나 큰 어머니의 사랑이었는지를!      


어머니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병든 자신에 대한 비관이나 억울함, 한숨과 울음 한 번 나는 본 적이 없다. 돌아가실 때까지 명료한 정신을 갖고 계셨던 어머니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병실 창가에 자리했던 침대에서 창을 통해 계절을 보고 세월을 쌓아오던 어머니. 어머니가 느꼈을 외로움과 막막함과 두려움. 거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어머니를 많이 괴롭혔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나에 대한 온갖 감정의 두께.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를 더 뜨겁게 울게 했던 건 그렇게 투사였던 어머니의 십육 년이 불쌍해서였다. 미안해서였다. 덕분에 내가 덜 힘들었음이 고마워서였다.     


©픽사베이


어버이날이 코앞이다. 나는 네 번째 가슴에 달아줄 수 없는 꽃을 산다. 이 꽃은 어머니가 계신 봉안당 유리창에 또 일 년 동안 꽂혀 있을 것이다. 갈 때마다 교환해서 붙여놓고 오는 손편지는 어머니께 들려드리는 내 목소리다. ‘엄마’ 하고 열 번을 부르면 ‘우리 딸, 사랑해.’로 열 번을 대답해주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짧은 여섯 음절 목소리가 자꾸 멀어지는 게 슬프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들어라. 모습은 사진으로라도 볼 수 있지만, 목소리는 떠나면 멀어지는 기적汽笛 같은 거더라. 



                      

                           - 한국일보 오피니언 2020년 5월 7일 게재 칼럼- 서석화의 정중한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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