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Grace Mar 28. 2024

4.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꽤 많이

실패는 성장 대신 고통에 둔감해지는 자신을 만들어요,

실패의 이야기.


사실 이제 와서 나의 실패의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겨우 잊은 기억이거나, 혹은 겨우 겨우 덮고 다시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실패의 기억은 수치의 일부일 것이다.


실패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지만, 나는 꽤 많이 실패했다.

사랑에도, 직업적인 부분에서도, 나의 꿈에서도 나는 많이 실패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내가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나의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레 나의 부모님은 내게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와 가까운 어른들조차 사랑은, 이성 간의 만남은 [허튼짓] 취급하였으며, 그 시간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이제 십 대에 들어선 남자아이에게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이제 무감각해질 때쯤, 나에게는 좋아하는 한 아이가 생겼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일지는 모르겠으나 바라만 봐도 얼굴이 발개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휴대폰도 없었고, 여자와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도 아예 몰랐던 나는 아주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쪽지를 적어 주었고, 작은 책자에 편지를 끼워 선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처음 사랑이 성공할 줄 알았던 걸까.

하지만 나의 망상과는 다르게 현실은 조금 차가웠다.


내가 비밀리에 준 쪽지는 확성기에 대고 이야기한 것보다 더 크게 소문이 났으며, 처음으로 나는 나 자신이 미워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외모가, 키가, 말투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생애 처음으로 수치라는 감정을 내 온몸과 마음에 사무치게 느꼈다.


그 후로도 수 차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좋아하기를 반복했지만 마땅한 성과는 없이 이십 대에 접어들었다.

스무 살의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나는 학습하지 못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수치스럽고 미안한 일이 되었으며,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면 의심이 먼저 싹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몇 번의 만남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수치와 의심으로 얼룩진 마음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잠깐잠깐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나는 사랑을 원하지만 육체적인 무엇을, 그것만 추구하게 되었으며, 상처는 곪아서 약간의 썩은 냄새를 풍겼다. 


사실 나는 지금도 사랑을 하고 싶다.


꿈은 어떠한가.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무대에 서고 싶었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오디션을 찾아다니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작은 기획사에서 나를 불러 계약을 진행하자고 이야기한 것이 결국 나와 나의 부모님에게 사기를 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나는 절망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체계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아마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후 나는 다른 장르를 좋아하게 되었다. 랩과 힙합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가사를 쓰고 랩을 하는 것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외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던 상황인지라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싸구려 노트북 내장 마이크로 녹음을 하고, 페이스북에 올리고, 그것 말고는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대는커녕, 녹음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스물한 살 나는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고, 한 두 해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부모님의 권유로 경기도의 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학교 생활에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과 생활은 내팽개치고 한 힙합 동아리에 입부하게 되었다. 잠깐의 오디션 후 정식 멤버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공연, 녹음등을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길거리 공연부터 축제 무대까지, 그리고 운 좋게도 다른 동아리들과 연합하여 이태원 클럽에서 공연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나의 천직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돈을 벌고 떵떵거리며 살 줄만 알았다. 하지만 역시 현실은 조금 달랐다. 

몇 번의 오디션 탈락과, 음원을 냈으나 한 달에 십 원 언저리 들어오는 저작권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며 한 달 백오십에서 이백시간의 아르바이트는 나를 갉아먹기 충분했다.


스스로를 해치려는 마음을 먹었으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어느 날 밤. 나는 음악을 그만뒀다.

나의 노트북에서 프로그램들을 삭제했으며, 그동안 작업했던 음악들은 다시는 찾아보지 못하도록 클라우드에 업로드시킨 후 비밀번호를 친구에게 변경하라고 시켰다.


허탈했으나 후련했다. 실패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조금 개운했다.


그 후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무엇을 하며 하루하루를 다시 살아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커피를 공부할까, 지게차 같은 기술을 배워야 하나 고민하다 나의 머리를 스친 것은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문신을 받는 것을 상당히 많이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하나하나씩 팔을 채웠고, 목에도 하나 새길 때쯤, 나는 문신을 하고 싶었다.


자주 방문하던 문신 작업자에게 어떻게 배우는지 수소문하여 학원을 등록하고, 꽤 버거운 금액을 수강료로 지불하고, 몇 개월의 수업 끝에 나는 문신 작업자가 되었다.


나는 미술을 한 번도 공부한 적 없다. 모순적이게도, 문신은 그림을 그려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문신을 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골라서 그림을 배웠다. 모르는 것은 같은 작업실에 있는 형들에게 물어 물어 배웠다. 짧은 시일 내에 기술이 전부 숙련될 수 없기에 또 형들에게 묻고 물어서 작업을 했다.


실력은 늘어간 것 같지만 내가 미숙했던 시절 했던 작업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늘어가는 항의 연락과 몇 번의 협박, 나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나는 이 시절 공황장애가 생겼다. 사람들에게 연락이 오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작업을 해야 하니 작업실에 출근하는 날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한 번 그만뒀다.


비겁하게도 나는 그 마음을 먹자마자 나의 작업 계정 전부를 지우고, 연락처를 한 번 바꾸고, 사람들이 나를 찾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지웠다. 사람이 싫었다. 나 자신이 싫었다.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나의 지난 시절들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다시는 눈도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문신을 그만두고 면접을 보고 잠시 회사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 달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금액이 나의 통장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이렇게나 안정되는 일인 줄은 몰랐다. 다만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그리움이 있던 것 같다. 가끔씩 그림을 그렸고, 이전에 문신을 하던 친구들과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고, 내 머릿속은 어느새 다시 문신 기계를 잡고 있는 나를 그리고 있었다.


몇 달의 고민과 고민 끝에, 나는 다시 문신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 그만둔 작업실에 사장님을 만나고, 그림을 그리며 준비를 하고, 다시 시작했다. 하나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은 문신 시장이 이전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방문하는 손님은 내가 그만뒀을 때 대비하여 반 이상이 줄었으며, 광고하는 비용도 꽤 많이 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내내 노는 때도 있었다.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 집중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일을 그만두고 작업을 했으나, 내게 들어오는 돈만 줄어들었을 뿐, 나의 통장은 뼈도 남지 않아 보일 정도로 말라갔다. 카드 값은 밀리고 있었으며, 휴대폰 비용, 대출 이자 또한 밀리고 있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때에 맞게 조금씩 공급이 있어 신용 불량자라는 딱지는 붙지 않았으나, 나의 마음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하고, 전화를 받았을 때 전화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가 [친절한 여성]이면 심장이 조이는 삶을 몇 주간 지속하다 보니, 나의 병 또한 지나칠 정도로 깊어져 있었다. 안정제 없이는 하루를 버틸 수 없었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를 이미 왔다 하더라도, 나의 주머니 안에 내 안정제 약 통이 없으면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약 통을 챙기러.


그렇게 버티고, 그렇게 버티다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심해지는 병과, 경제적인 압박, 앞으로 나의 삶은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더 나아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무력감이 찾아왔고, 나는 결심했다. 다 끝내기로.


첫 번째 이야기에서 다뤘던 내용이 일어났고, 사흘 후에 깨어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사흘 간의 일로 인해 저는 다리와 더듬는 입술을 가지고 의사와 부모님과의 몇 시간의 이야기 끝에, 나는 문신을 완전히 그만두기로 다시 결정했다. 그 후 문신 기계를 작업실에서 빼고 침대 가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고, 이제 이 일은 나에게는 해당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실패했다. 치명적 이게도 실패했다. 나의 삶을 수 차례 끝낼 수 있을 만큼 부서지고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실패했고, 남아있는 것은 꽤 큰 빚과 비대해진 몸뚱이뿐이라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다.

이전 04화 3. 나는 약을 먹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