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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Apr 02. 2024

잠겨간다는 것의 미학, 그리고 흔적들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이제는 걸어 나오는.

5. 잠겨간다는 것의 미학, 그리고 흔적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항을 집에 둬 본 적이 있는가?

어릴 적 마트에서 산 금붕어 몇 마리가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작고 볼품없는 어항 말이다.


만약 있다면, 그 어항 속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작은 생명체를 위하여,

하루에 한두 번 먹이를 주었을 것이다.


혹시 어항에 먹이를 뿌렸을 때 그 먹이를 유심히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먹이보다는, 그 먹이를 먹으려 달려드는 생명체에 대체로 관심이 있으니.


아주 가끔, 나는 입을 뻐끔거리는 그 생명체보다 오히려 먹이에 시선을 둔 적이 있었다.

대부분 그 먹이는 물에 뜬다. 아마 어떠한 과학적인 이유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공식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아주 종종, 어떠한 먹이 덩어리들은 그 생명체에게 먹힐 기회를 놓친 채 아주 천천히, 천천히,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 생명체가 이 먹이를 입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아주 느린 속도로 잠기어간다.


신기했다. 그런 덩어리를 볼 때 나는 그 덩어리가 완전히 어항의 바닥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잠긴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그때부터 하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생각을 조금 해 본다.


내가 아주 어릴 적 병원에서 첫 진단을 받았을 때, 그때부터 나는 잠겨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탓할 생각은 이제는 없다.


어쩌다 보니 나의 머리가 나를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 툭 하고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후 이십 년 가량을 아주 천천히 잠기었다.


힘이 센 친구에게 처음 폭력이라는 것을 경험했을 때 조금,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썼을 때 조금,

절망이라는 것을, 수치라는 것을 느꼈을 때 꽤,

우울증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여 안정제 주사를 맞고 아주 천천히, 빠른 속도로 잠에 들었을 때 꽤,


난생처음 듣는 외국으로 강제로 떠나게 되었을 때 꽤,

그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과 폭행을 당했을 때 꽤,

몇 차례의 거절과 배신을 당했을 때 꽤,


내 귀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꽤,

실패를 지독할 정도로 계속 경험했을 때 꽤,

심장이 멎을 정도의 공포를 느꼈을 때 꽤,


이 모든 좋지 않은 경험들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이 모든 경험들의 공통점은, 나는 이 모든 순간에 이 생의 끝을 바라보았다.

나의 숨이 멎으면, 나의 눈이 감기면, 내가 이곳이 아닌 그다음 곳에 있다면, 그때는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눈물은 나지만 아름답지는 않은, 지독하리만치 침울한 생의 끝을 상상했다.


그래도 이 침전되어 가는 과정 한가운데에서 나는 소소한 미학을 찾으려 애를 썼다.

나의 이 절망이 만들어내는 어떠한 창작물을 세상에 보였을 때의 아름다움,

누군가가 나의 죽음이 담긴 음악을 듣고 꽤 괜찮다는 칭찬을 해 주었을 때의 아름다움,

나의 죽음을 숨기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누군가의 몸에 새겨준다는 끔찍한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죽음 그 자체인 그림을 팔에 새기고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아름답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아름답지 않다. 그 아름답지 않은 한 인간이, 결함과 틈으로 빚어내고, 눈물을 여러 방울 추가하며, 피와 고통에 찬 신음으로 마무리한 예술은 나에게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다르다.


전부를 모르고 단면을 보는 그 누군가는, 그저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저 대양의 아래에서는 버려진 플라스틱에 고통받는 생명체가 있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광활한 대지와, 노란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산속에서는,

밀렵꾼의 총에 맞아 자신의 생명을 흘려가며 생존을 위하여 도망치는 한 짐승이 있다.


두꺼운 화장 속에, 사람 좋은 미소 안에,

인생의 밑바닥을 누비고 있는 사람의 영혼이 있다.


아, 정말 아름답다. 아, 정말 미치도록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나의 아름다움은 흔적을 만든다.


실패와 타락으로 점철된 나의 과거는, 상당한 빚이 쌓여있는 나의 통장을 만들었고,

아무도 믿지 못해 내뱉었던 말들은, 누군가의 마음에 꽤 깊은 상처를 낸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던 나의 몸은, 잉크로 하나 둘 채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은색의 무엇인가로 그림을 그렸던 나의 팔 끝 어느 부분에는,

붉은 그 흔적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이것이 아름다움이라면 나는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름다움이라면 나는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무던한 마음을 고를 수 있을까.


나의 흔적을 지울 수 있다면 과연 나는 기꺼이 이 흔적들을 지울 것인가.


아니. 나는 아름다울 것이며, 나의 흔적은 이 삶이 끝날 때까지 가지고 갈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앞으로의 수 십 년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나는 가지고 갈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약속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제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는 나의 삶에서는 나는 조금 다른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한다.


이렇게 살았던, 혹은 어떻게 살았던,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살아낼 하루하루가 조금씩 중요해지고 있다.

나는,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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