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Grace Mar 26. 2024

3. 나는 약을 먹습니다.

아마 7세 때부터 작년까지, 약을 먹었습니다.

사실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한다면 약을 먹는 것이 아닌, “약을 먹었습니다.” 가 더욱 맞는 제목일 수도 있다. 현재는 그 아무 약도 먹지 않는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약은 정신과 약이다.


나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초등학교 때부터 정신과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나의 부모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문제를 발견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간 병원에서 나는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ADHD)”라는 진단을 받고 처음으로 약과 놀이치료를 받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 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방문해 상담을 받고, 놀이 치료라는 것을 진행했다. 매일 아침 등교 전 나의 부모님께서는 내가 약을 먹었는지 확인하셨고, 그때부터 나는 내가 무엇인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달았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주의를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는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무의식 중으로 알게 되었고, 철저히 이 모든 것들은 비밀로서 숨기게 되었다.

다만 사춘기의 시작이 조금 빠른 초등학교 고 학년 때부터 진행되어, 심해진 폭력적인 성향, 혹은 쉽게 분노하는 성향은 거의 매일 같은 반 동급생들과의 싸움으로 이어졌고, 수차례의 싸움과 수차례의 부모님의 방문으로 인해 내가 정신과에 다니고, 약을 먹는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나는 일은, 전날 주먹다짐을 한 친구에게 사과를 하려고 말을 걸었을 때,

“정신병자와는 할 말이 없다."라고 쏘아붙인 그 친구의 말투와 표정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라는 것을 만들었을까 싶다.


그렇게 수년을 ADHD 약을 복용하며 지내왔지만, 조금씩 나의 마음과 나의 삶은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중학교 2학년 때 나의 반에는 그 당시 소위 말하는 ‘일진’ 친구들이 있었고, 어쩌다 보니 나는 그들 눈에 찍혀 수개월 동안 괴롭힘과 폭행을 당하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겨울부터 나는 등교를 거부하고 밖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다른 무엇인가가 나의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중학교 삼 학년 때부터 나는 무대에 서고 싶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 컴퓨터로 보았던 가요 프로그램의 가수들이 너무 행복하고 멋있게 보였고,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여느 부모님들이 그렇듯 반대하셨고, 나는 부모님 몰래 기획사들을 찾아가며 오디션을 보았다. 다만 그 어느 기획사도 나를 다시 부르지 않았고, 한 곳은 나와 나의 부모님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여 나는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그 기회조차 나에게 없다는 절망감이 찾아왔고, 나는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집에서 벽을 주먹으로 치고 주먹에서 피가 흘렀으며, 물건을 부수었다. 혼자 울었고, 집을 나가 며칠을 밖에서 찜질방과 노숙을 전전하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 생활을 며칠, 혹은 몇 주 정도하다, 나는 말로만 듣던 ‘정신병원’에 ‘강제입원’하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는 병명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주요 우울 장애’ , 이것이 나의 두 번째 병명이다.

먹는 약이 늘어났으며, 의사 선생님의 말로썬 꽤 심한 정도의 우울증이기에 더욱 자주 병원에 방문해 상담과 약 처방을 받았다.


이 정신과 약을 먹는 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내 약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약을 먹으면 불가항력적인 졸음이 밀려오고, 퇴원 후 전학 간 학교에서도 꾸벅꾸벅 졸다가 전학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욕을 먹기 일쑤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살벌한 경고를 매 순간 들었는데 먹을 수밖에 없지 않나.

그렇게 약을 먹으며, 몽롱한 정신으로 살기를 수년, 나에게는 다른 약이 찾아왔다. 선물처럼. 물론 반어법이다.


내게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을 의사 선생님께 이야기했을 때, 그분은 다른 약을 함께 처방해 주셨고, 내가 매일 먹어야 하는 약봉지는 더욱 두툼해져 갔다. 먹고 나서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신이 몽롱해졌고, 혹여나 더욱 피곤한 날이면 약을 먹고 스무 시간이 지나서야 잠에서 깬 날 또한 있었다. 이런 부작용을 달고 살기 지쳤는지 나에게는 어느 순간 약을 먹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고, 당연히 증상은 더욱 심해져만 가 나는 어느새 외출도, 일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혼자 틀어박혀 벌벌 떨기만 했다.


나는 원래 술을 먹지 못한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유전적으로 나의 조부님께부터 이어져 온 알코올을 잘 분해시키지 못한 간 덕분에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함에도, 나는 이 시절 매일 밤을 한번 시키면 이틀 동안 먹는 짬뽕과 소주로 지새고는 했다.


또다시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흘렀고, 이쯤 되면 나는 이 정도로 약을 먹으며 인생을 마감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친구가 찾아왔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홍익대 근방에서 일을 마치고 본가인 성남으로 넘어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한남대교 위로 지나던 와중, 갑작스럽게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왔으며,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가 내 몸을 휘감았고, 숨쉬기조차 어려웠으며, 당장이라도 나는 죽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때 생은 끝나지 않았으며, 바로 다음날 병원을 찾아 그때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고, 의사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덤덤히 나의 처방전을 고쳐주었다. 나의 몇 가지 병명 중 공황장애가 추가된 순간이었다.

공황장애 약은 매일 저녁 먹는 약봉지에 담겨 있지 않았다.

언제라도 발작이 왔을 때 쉽게 꺼내 먹을 수 있도록 하얀색 플라스틱 통에, 혹은 갈색 유리병에 알약 십수 개 이상이 담겨있었으며, 보통 하루에 세 알에서 네 알 정도 꺼내 먹을 수 있는 양이 있었다.

공황은 잔인하리만치 나를 괴롭혔다. 하루에 네 번 이상 발작이 찾아온 날 또한 있었으며, 그 순간마다 나는 이 삶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아무리 안정제를 털어 넣어도 무엇 하나 나아지지 않고 점차 더 많은 알약을 먹어야 발작이 안정되었다. 


하루에 두 번 이상 발작이 찾아온 날은 나는 양화대교를 찾았다. 원래는 악명이 높은 마포대교를 처음엔 찾았으나 여러 이유로 난간을 위로 길게 연장을 해 놓았다는 것을 조금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숨을 쉬는 것인지 숨이 막히는 것인지 모르는 호흡을 한 채 난간에 손을 올리고 울고 있는 한 사람을 말리기 위해서 꽤 많은 수의 시민과 꽤 많은 수의 경찰과 구급 대원이 출동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지금은 퍽 죄송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겨우 양화대교 위에서 진정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처음 보았던 것은 다리 밑으로 대기 중이던 세 대의 보트와 내 뒤에 두 대의 순찰차와 한 대의 구급차였다.


그때 나는 삶의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이유를 찾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 이유 자체를 포기했던 것일 수도 있다.

수년을 몽롱한 상태로 살아온 내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다.


한동안 약을 꽤 많이 삼키며 살아온 수개월 동안은 나는 나의 삶의 세세한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그때의 나는 많이 아팠으며,


많이 괴로웠고, 

많이 눈물 흘렸고, 

많이 다리 위에 올랐고, 

많은 술을 마셨고, 

많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했다.


한두 번 나의 팔에 붉은 흔적을 새긴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약들을 사용해서, 이 기나긴 고통의 줄을 스스로 자르려 했다.


며칠간 의식이 없었고,

며칠간 나의 부모는 꽤 많이 울었으리라,

아마 내가 믿는 신 또한 많이 슬퍼했겠지.

하지만 결국엔,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이전 03화 2. 나는 버림 받았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