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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Mar 19. 2024

1. 이 나라는 어디이고,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열일곱부터, 스물 하나까지의 생존기.

    열두 해 전 정도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흘만 더 결석하면 중학교 유급을 할 수도 있는 위기를 겨우 넘긴 채,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대신 청주에 있는 자그마한 대안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평범하지 않은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자며 나는 혼란을 겪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가 꽤 길었던 것 같다) ,    매주 월요일마다 버스를 타고 성남에서 청주로 내려가는 대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집이라는 공간이 더 이상 나에게는 편안한 공간이 되지 못하여, 나는 나의 집을 대체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헤맸으며, 결국 찾지는 못하였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자주 버리신다 (이 이야기는 3화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이 방황이 계속 길어질 때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 당시 교회에서 후원하던 선교사님이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계시는데 거기 나의 친구도 함께 있다고, 거기 살아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사실 의사를 물으셨다기보다는 통보에 더 가까웠다.

    당연히 나는 거절했다. 평범한 유학도 아닐뿐더러, 교과서나 다큐멘터리에서만 보던 그런 나라를 왜 가야 하는지 납득도 되지 않았으며, 친구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십수 년간 지내오던 도시와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나 홀로 이주해야 하는 것이 극도로 싫었다.

    거절을 표현했으나, 아마 나의 부모님은 이미 교회 목사님과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끝내셨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는 새 나의 출국일이 정해졌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정신없이 출국 짐을 싸고 출국하게 되었다. 십 대의 어린 나이에는 어떻게 논리적이고 확실하게 거절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파악하기조차 어려웠으리라.

고된 비행을 마치고 나를 마주하는 것은 찌는 더위와 숨이 턱 막힐 만한 습도였다. 낯선 언어와 낯선 사람들 사이 나와 나의 친구, 마중 나오신 선교사님의 사모님은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마 한 탕 챙길 만한 호구로 보였으려나 모르겠다.

    실랑이와 현금의 주고받음 끝에 겨우 공항에서 나와 내가 살아야 할 집, 나와 나의 친구, 세 명의 캄보디아인 남자, 한 명의 선교사님의 조카, 한 명의 캄보디아인 여자, 선교사님과 사모님과 함께 거주하는 3층 주택으로 향했다. 낯 선 향기와 방의 구조, 그것에 적응할 새도 없이 마주해야 했던 것은 폭력이었다.

선교사님은 열두 해 전에도 나이가 많으셨다. 아마 그가 살아왔던 환경은 알게 모르게 그때와 지금의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그를 폭력적으로 만들었겠지.

    그분과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그는 그 당시 머리가 조금 길었던 나의 친구의 뒷머리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선교사라는 것을 망각할 만큼의 욕설과 함께 내일까지 머리를 잘라오라며 윽박지르기 시작하셨다. 그때부터였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이 집에서는 매일 오전 네 시 삼십 분, 새벽 기도가 시작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무릎을 꿇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한다. 혹여나 졸거나, 선교사님께서 외우라 하셨던 성경 구절을 외우지 못했을 때에는 두꺼운 나무 방망이로 무차별한 폭력이 가해졌다. 이 시간이 더 괴로웠던 이유는 영어를 배우게 한다는 이유로 매일 밤 자정까지 강제로 거실에 앉아 단어를 외우고, 공부를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십 대의 나이에 하루에 네 시간 혹은 그 이하로 잠을 잔다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이 나이부터 흡연을 시작했다. 우연히 시작한 흡연은 계속되었고, 엄격한 규율을 깨는 것이 재미라고 누가 말했던가, 몰래 피우는 담배가 그때는 제일 좋았다.

하지만 거짓말은 항상 오래가지 못하고, 흡연을 하는 것이 들통나 나와 내 친구는 새벽 예배 때 존 벌에 더해져 그날 새벽 더욱 심하게 매를 맞았다.

    매를 맞고, 매를 맞고, 

    이제는 고통이 둔감해질 때쯤 그날 나는 폭발했다. 뒤에 놓여있던 가구를 던지고, 부수고, 집을 나왔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었다. 아무리 가정에서 감당이 되지 않아 내보내졌다지만, 이 정도의 폭력을 견디며 살 수는 없었다. 아마 그때 나는, 차라리 연고 하나 없는 이 도시에서 객사하는 것이 매일 밤에, 아침에, 폭력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했겠지.

    집을 나와서도 매일 울었다. 아무리 강한 척을 다 하는 십 대의 남자지만, 낯선 도시와 낯 선 사람, 길에 가끔 보이는 약에 취한 외국인,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그 남자에게는 공포였다. 그럼에도 그 집으로 돌아가기는 무서워 낮에는 피시방 입구에 있는 소파에서 잠을 자고, 밤에는 아주 싼값으로 오후 열 시부터 아침 일곱 시까지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을 구매해 시간을 보냈다. 무료하고, 무섭고, 불안한 수 일을 보내고 친구의 설득으로 그 집으로 돌아와 결심했다. 이 나라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나는 이 집에서는 더 이상 살지 못하겠다 생각했다.

    우연히 보게 된 한인 소식지에 홈스테이 공고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에게 제발 살려달라는 호소문과 함께 그 공고 사진을 보내드렸고 결국 나는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두 달 반 만에 탈출할 수 있었다. 새로 옮긴 집은 너무 좋았다. 일단 나 혼자 쓸 수 있는 방이 있었으며, 따뜻한 물이 나오는 화장실과, 현지 음식이 아닌 그래도 한식 같아 보이는 따뜻한 식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한 일인지 나는 그제야 알았다.

    하숙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했으며, 그 집 아들과 같은 집에서 살게 되어 이 나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가기 시작했다. 국제 학교 입학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정말 다행히도 3주 만에 국제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안에 쓸쓸함은 커져갔다. 이미 이 나라에서 오래 산 다른 사람과 다르게, 나는 이제 막 이 나라에 들어온 한국인이었다. 다른 이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적응하며, 자신의 성향을 알맞게 개조한 것과 다르게, 나의 성향과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몇 가지 문제들과 함께 처음 입학한 국제 학교에서 한 학기만을 수료한 채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나는 이방인이다.

    학교를 한 번 옮겼으나 나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중학교 삼 학년 때 진단받은 우울증은 더욱이 심해졌으며, 학교생활을 하기보다는 노는 것에 더 집중했다. 친구들과 밤새워 놀고, 학교에서는 숙면을 취했으며, 학교를 빠지거나 몰래 조퇴하는 방법에서도 나는 도가 트게 되었다.

    결국 두 번째 학교도 자퇴하게 되고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된다. 마침 하숙집 근처에 한인 검정고시 대비 학원이 있었고, 3개월 만에 드디어 2014년 4월에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 검정고시를 합격한다. 

    사실 나는 이 시점에서 나의 이 지옥과도 비슷하고, 무료한 이 유학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추측했다. 이미 나의 부모님과도 다시 캄보디아로 귀국해서 대학교 입학을 위한 토익, 토플 시험을 준비하여 입시 일자에 맞추어 귀국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나, 내가 캄보디아로 귀국하고 나서 며칠 후 나의 부모님은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드셨다.

    아직까지도 십 대인 나는 한국도 아닌 외국에서 부모님의 지원 없이 무엇인가 하기는 불가능했다. 매일 밤마다 통화로 한 시간 이상씩 부모님과 언쟁을 벌였으며, 결국 그때 나는 부모님을 이기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하숙집에서 나와 혼자 살기를 시작했다. 

물론 대학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나아질 줄 알았던 우울증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무기력증에 빠져 학교는 물론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식사는 대충 때우기 일쑤였으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밤을 새워 게임을 하거나 영화 혹은 드라마를 불법 다운로드해 시간을 때웠다. 학교에서 경고 메시지가 날아올 때면, 밤을 새우고 운동할 때 가끔 먹는 카페인 알약을 먹고 억지로 자리에 앉아있다 나왔다.

    내 집에서는 항상 담배 냄새가 끊이지 않았으며, 가끔 마시지 못하는 술을 마셔 바닥에 나뒹굴어져 있는 맥주 캔과 술 병이 발에 밟혔다.

    그 생활을 한지 몇 개월이 지났을까, 어느 날 나는 나의 짧은 생에서 나의 생을 뒤바꿔버릴 상황을 겪게 된다.

그날도 새벽까지 친구와 게임을 하고, 새벽 네다섯 시쯤 집으로 돌아와 대충 어제 먹다가 남은 빵 몇 조각을 야식으로 먹고, 침대에 겨우 누워 잠을 청하려 했으나,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나의 귀 바로 옆에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이름을 불렀다.


1시간 동안 반복된 환청의 시작으로, 나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만 울리는 소리가 아닌 실제 귀로 들려 나의 고막을 울리는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더 망가져갔다.

아예 외출하는 횟수도 줄였으며, 소리를 듣지 않고 잠을 자기 위하여 마시지 못하는 술을 매일 수 병 씩 마시고 억지로 취한 기운에 잠에 들었다. 하루에 세 갑 이상씩 담배를 피웠으며, 방을 정리하려는 노력도 하지 못한 채 나의 온 방에 담뱃재와 먹다 남은 술병들이 마치 지금의 나의 모습을 이야기라도 하는 듯 널브러져 있었다.

    하루만 더 살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이전에 현지인 친구가 이곳에서는 돈만 있으면 외국인도 총기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고,

나의 고통을 나 스스로 끝내고 싶어 거리를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이 생을 끝내고 싶은 것인지, 이 생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할 수조차 없었다. 그 고민을 하는 순간 나의 귀에선 소리가 들렸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히도.

너무나 다행히도.

대한민국의 남성이라면 성인이 되자마자 받아야 하는 신체검사 일정이 잡혔고, 나의 부모님은 한국에 오라며 나의 비행기 티켓을 보내주셨다. 한국에 도착하자, 나는 울었다.

    도대체 이 나라가 뭐길래 나를 이토록 학대했으며, 나와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나의 두 눈에서는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감정이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마침 고향에서는 신체검사 대기인원이 많아, 대전으로 이동하여 신체검사를 받게 되어 나의 아버지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할 날이 있었다.

한 묶음의 서류와 함께 신체검사를 마치고, 아버지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 아마 태어나서 처음 솔직하게, 그리고 가장 예의 있게 아버지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기회라고, 나는 너무나도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마음을 아셨는지, 혹은 더 듣기에 지치셨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서는 나의 영구 귀국을 허락해 주셨으며, 나는 다시 캄보디아로 가 짐을 싸고, 1주일 후 아예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가끔씩 누군가가 내가 유학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부럽다는 투로 이야기하곤 한다. 물론 어떤 마음인지는 너무나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때 나의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유학이 아닌 유배의 개념이었고, 그곳에서 겪지 않아도 됐을 어른의 폭력과 한두 살 위의 선배들의 폭력을 겪었으며, 사람들에게 이용당했으며,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하고, 얻지 않아도 되었을 병을 추가로 얻었다.


내가 얻은 것은 지금은 그것도 가물가물한 영어를 조금 하는 방법이었다.

사실 아직도 나에게는 의문이다.


그때의 나는 어디에 있었으며, 그때의 나는 누구였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래도 나는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어쩌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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