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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Grace Mar 21. 2024

2. 나는 버림 받았습니다.

버림받는 것은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공감할 수도 있을지 나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 이야기의 프롤로그에 적었던 이야기들의 기반이 되는 것은 지금 내가 적는 이 ‘버려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나의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매우 적었다. 유치원 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니 넘어가고,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나는 집에서 나의 부모님을 보기보다 낯선 파출부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직장에서 아주 바쁘게 일하고 계셨으며, 어머니는 학교 교사의 생활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진행하고 계시어, 부모님을 만나고 잠에 들려면 나는 밤 열한시 혹은 열두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점점 나의 부모님과 어색해져만 갔다.


초등학교 이 학년 때부터 ADHD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를 얻고, 몇 가지의 문제를 일으키고 나서 어머니께서 학교를 휴직하시고 나와 함께 하였을 때, 어머니와 함께한다는 기쁨보다 괜히 어색한 마음이 컸던 것은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충분한 유대감을 가질 수 없는 채, 아직 어색한 나의 어머니와 일어나서부터, 하교 후, 자기 전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는 고역이었겠지.

몇 가지의 사고를 치고, 몇 가지의 문제를 일으키고 나는 겨우 중학교에 진학했다. 일 학년과 이 학년을 가끔 당하는 따돌림을 겨우 견디고 3학년에 진학하자마자 새로운 문제가 시작됐다.


그때부터 나는 음악을 전심으로 하고 싶어 했고, 기획사 오디션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내가 ‘평범하게 (사실 그 평범함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살기를 원하셨던 나의 부모님과의 갈등이 심해졌다. 한 번의 사기를 당할 만한 상황을 넘어서며, 나에게는 실패담과 박탈감, 분노가 가득했고, 가출을 한다거나, 폭력적인 성향을 아주 가끔 분출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컴퓨터로 드라마를 보고 있던 와중 집에 낯선 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을 열고 세 명의 남자를 맞이했으며, 그 사람들은 나의 팔을 잡았다.

“ㅇㅇㅇ 씨 되시죠?”

“네 그런데요?”

“잠깐 같이 가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나의 팔을 잡고 1층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구급차에 나를 태우고, 사실 눕힌 채 벨트 같은 것으로 나의 몸을 묶고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도착한 곳은 여주 혹은 이천의 외곽 정신 병동이었다. 나는 아주 간단하게 병원 의사와의 면담을 하고 몸이 묶인 채 독방에 들어가 침대에 다리가 묶인 채 잠이 잘 오는 약, 안정제를 주사 맞고 잠들었다. 그렇게 나는 삼 주 간의 병원 생활을 했으며, 나의 부모님은 단 두 번 오셨으며 그곳에서 하루하루 피폐해지는 생활의 끝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퇴원하면 그래도 집에서 다시 생활을 시작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미리 계획이라도 다 짜놓은 듯, 이미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의 짐을 다 가지고 경상북도 상주 화서리라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사실 고속도로를 타는 순간에도 나는 내가 정확하게 어디를 가는지 알지 못했다.


이전에 살던 분당이라는 도시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빌딩은 무슨 이 화서면에서는 3층을 넘는 건물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전학 수속을 밟았으며, 이전의 나의 집이 아닌 공사 중인 건물 뒤 편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나와 다른 몇 명의 사람들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말투도 다르고, 생긴 것도 어쩌면 미묘하게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는 이방인의 삶을 시작했다.

머리를 촌스럽게 자르고, 사투리를 쓰면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될까 하여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예쁘지 않게 자르고, 사투리를 흉내 냈지만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같이 잠을 자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 혼자만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공감대 자체가 생길 수 없었으며, 나는 학교에서도, 하교해서도 이방인이었다.

혼자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아졌으며, 이방인의 삶을 적응할 수 없어 용돈을 조금씩 모아 고속버스 표를 사고 혼자 분당으로 올라왔다가 다시 부모님에게 잡혀 시골 마을로 돌아가게 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9개월간을 그곳에서 지냈으니 나는 집이 그리웠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나는 이제야는 집을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친절하신 부모님께서는 내가 일반 고등학교를 갔을 때 적응을 잘 못할 것을 염려하셨는지 나를 청주에 있는 대안학교에 진학하도록 하셨다.

그 학교는 사실 비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아니다. 또한 장애인 중에서도 서번트 증후군 (Savant Syndrome), 자폐나 지적 장애를 가졌으나 예술 계통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친구들을 위한 학교였으며, 비 장애인은 몇 가지의 시험을 통과하여 함께 지내도 좋다는 교장의 재가가 있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

나의 부모님이 어떻게 나를 그 학교에 입학하도록 하셨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세 번째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학교 자체가 기숙 학교였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머물며 생활해야 했으며, 원래는 2주에 한 번씩 집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교장의 특별 배려로 나는 1주일에 한 번 집을 갈 수 있었다.

집에 올라갈 때면 나는 항상 내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워 손을 떨기도 했다.

이곳에서도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스무 명이 넘는 학생들 중 비 장애인은 나를 포함하여 고작 세 명이었다.

대화를, 혹은 같이 무엇인가를 할 친구들은 그때의 내가 보았을 때는 없었다.

다만 그 학교가 비인가 대안학교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기 위하여는 검정고시 준비 혹은 방송통신 고등학교 재학이 필수였고, 어쩌다 보니 나는 방송통신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게 되었다.

2주에 한 번 전부 모여 대면으로 수업하는 날들이 있었고, 나는 학교 친구들 대신 그 학교를 다니는 소위 말하는 ‘노는 형’들과 친해졌다.

기존의 친구들 보다 그 형들과 더 만나고 연락하게 되었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담배를 그때 배웠다.


그리고 나는 이 대안학교에서의 생활이 날이 갈수록 나의 뼈를 깎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이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검정고시 혹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으며, 그때 나의 네 번째 버림받은 순간이 다가왔다.


1화 글에서 말했듯이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내 친구와 선교사님이 계신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하여 계속 언질 하시기 시작했고 나는 거절했다. 그때 내가 더 강하게 거절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졸지에 나는 떠나게 되었고, 폭력과 상처에 물든 나의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1화에서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선교사님의 폭력에 더는 견딜 수 없던 나는 나의 부모님께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다. 선교사가 폭력을 쓰고 견디기 힘들다고 계속 말씀을 드렸다.

다만 나의 부모님께서는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하셨고, 사실 이때 나는 나의 부모님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길을 걷다가도 공사용 트럭에 몸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나의 우울과 불안은 심해져 반 협박 식으로 나의 부모님을 설득해 나는 그 폭력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는 하지만, 도망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 도망은 유일한 생존의 수단이다. 아주 다행히도 도망친 곳은 나에게는 쉴 수 있는 공간이어서 우여곡절 끝에 국제 학교생활, 그리고 검정고시까지 통과하여 나는 이제 귀국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와 짐을 싸고, 토익 토플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나의 부모님께서는 전화도 아니고 메신저로,

[그곳에서 대학을 다녀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다섯 번째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과 부서짐의 시간인데 나의 부모님께서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를 그 고통 속에 더 살도록 내버리셨다.

그렇게 그 나라에서 1년 정도를 더 살게 되었으며, 그때 나는 원래 있던 우울증과 함께 조현병 (소위 말하는 정신분열)을 얻게 되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생존을 위해 나의 생명을 깎고 있었다.


목숨을 건 읍소 끝에 나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으나, 나의 부모님과 나의 감정의 골은 이제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청소년기의 시간과 스무 살의 시간을 버리게 하신 부모님과의 갈등과 감정의 골은 회복되지 못했다.

나는 다섯 번 버림받았고,

다섯 번의 버림받음 동안 한 번당 수 십 번씩 울었으며,

수 십 번을 눈물 흘릴 동안 그분들은 항상 나의 곁에 없었다.

나의 가족은 나를 위한 가족이 아니었다.

아마 이 상처는 내가 평생 지니고 가야 할 상처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며,

이미 씹을 만큼 씹어 너무나도 질겨진 나의 원망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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