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Grace Apr 23. 2024

하루만 더, 다시 하루만 더.

그 후의 이야기. 1.

“아무래도 크게 x 됐다.”


3일 만에 깨어나서 부모님 손에 이 병원 저 병원 오가다 들어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제일 먼저 한 생각이다.

다리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감각이 아직까지 둔하다.


머리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하였으나 몽롱하다. 하루종일 식사다운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삶과 죽음이 오고 가는 응급실에서 나는 조용히 누워 몇 팩 째인지 모르는 수액을 계속 맞고 있다. 화장실을 가고 싶어 움직이고 싶었으나, 간호사 선생님께 혼이 났다. 바늘 빠지니까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을 경우 침대에 달려 있는 통을 이용하라고 혼이 났다.


상당히 몽롱한 정신이지만, 이것이 꽤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아침부터 밖에 나와 있었으니 열몇 시간을 병원에만 박혀 있었다. 지루하다. 간호사, 의사 선생님이 나의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인다. 궁금해 미칠 것 같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물어볼 염치는 또 없다.


담배를 태우고 싶다.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 흡연 욕구라는 것은 더 타오른다.


아침에 다니던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의 부모님이 아닌, 의사 선생님이 아닌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솔직하고 싶지만, 나의 부모님에게는 나는 솔직할 수 없다.


내가 그래도 친하게 지내던, 이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형에게 연락을 한다. 메시지를 보낸다. 다니던 교회 목사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 형에게 십 분도 걸리지 않아 전화가 왔다. 잠깐의 대화 후, 마음이 그래도 조금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절망의 늪을 헤쳐와, 도달한 곳은 가장 깊은 곳인데, 그 와중에 잠깐의 빛이 나의 눈가를 스친다.


교회 목사님에게서도 따뜻한 메시지가 도착한다. 사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라왔지만, 깊은 신앙의 이해 혹은 믿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목사님의 메시지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이십 년 이상을 교회에 다녔기에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 큰 죄라는 생각이 있었고, 이제 나는 용서받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는 몇 가지의 성경 구절로 나의 이 무서움을 깨어 부숴 주셨다.


[사 1:18, 쉬운 성경] "오너라, 우리 서로 이야기해 보자. 너희 죄가 심하게 얼룩졌을지라도 눈처럼 깨끗해질 것이며, 너희 죄가 진홍색처럼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희어질 것이다.


나의 부모님조차도 이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용서한다거나, 괜찮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지 않으셨으나, 내가 알지만 몰랐던 이 책에서는 나를 용서한다고 한다.


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나는 이 긴 하루를, 길지만 몽롱한 이 하루를 정신없이 마무리한다.


내가 기억이 없는 약 사흘 동안, 나는 많이 다쳤다. 발에는 큰 화상이 생겼고, 무릎에는 힘이 없어졌으며, 말을 더듬게 되었다. 매일같이 병원에 찾아가 약을 받고, 상처에 붕대를 갈고, 정신과에 다시 찾아가 상담을 받아야 했다.


약속을 다 취소해야 했다. 무릎에 힘이 없어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이 전에는 십 분이면 가는 거리를 삼십 분 이상 걸어야 했으니, 움직이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무리였다. 이야기를 더 하지 않게 되었다. 말을 더듬고 있는 나의 모습이 꽤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 대학 병원에 다니며 하루를, 정신과에 다니며 하루를, 방에서 멍하니 자책을 하며 하루를,

그렇게 하루씩 의도치 않게 다시 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정준일의 [하루만큼 하루만 더]이다.

가사는 그때의 나와 많이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이 노래 제목을 너무 좋아했다. 나는 당장 그 하루를 버티지 못하여 삶의 종착으로 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내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나는 다시 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다행히도 나는 하루씩 더 살아가는 것을 계속 선택했고, 조금은 하루에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플지라도, 고통스러울지라도, 숨을 쉬는 것 자체가 나에게 큰 과제처럼 느껴질지라도, 나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며 하루를 다시 걷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의 고통의 향기가 지독하고 붉은 악취일지라도, 다른 이들이 이 향을 맡지 못하는 것을 다만 ‘소망’할 뿐, 억지로 감추며, 나 자신을 다시 굴로 밀어 넣지 않았다.


죽음은, 약은 나에게는 상당히 가까워서 당장 나의 눈앞에 선명했지만, 하루씩 더 살아가며 나는 나의 눈을 그곳에서 조금은 돌려 다른 곳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제야 내가 안 것은, 시선이 아주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나는 더 아름다운 것을 자연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내가 그 선택을 한 계절은 봄이었다.


절망과 고통과 외로움을 넘어, 그 하루씩 더 살아가고자 할 때 내가 보게 된 것은 땅이 아닌 하늘이었으며, 어느새 만개한 꽃과 소름 끼칠 만큼 환한 나무의 색깔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눈이 부시도록 맑고 밝은 하늘이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다시 떠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매일같이 나에게 연락을 해 주고, 나를 만나려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와 주었으며, 굳이 내색하지 않고 나를 재미있게 해 주려 애를 써 주었다. 그 덕에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웃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이것을 기다려왔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사실은 누구보다 밝게 웃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사실은 사람을 그리워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끔찍한 이 병에서 걸어 나올 수 있을까.


하루씩 더 살아가다 보니, 나에게는 하루씩 더 희망이라는 희미한 생각이 찾아왔다.


다시 이 희망에게 배신을 당할지라도,

다시 이 빛을 내가 잃어버릴지라도,

다시 이 삶을 내가 내려놓고 싶을지라도,


나는 이 하루를 살기로 약속했다.

다시 하루 더 살기로 약속했다.


다시, 걷고, 숨을 쉬고, 웃기로 약속했다.


이제 한 장이 끝났다. 다른 장을 읽을 차례이다.

이전 10화 그 선택을 했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