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나 둘, 하나 둘.
1. 만남
‘그’ 선택이 있고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한 걸음씩 사람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여전히 무릎의 통증이 있어 오른 다리를 절고, 말을 더듬으며, 불안과 죄책이 불친절하게 찾아오지만, 우연들이 겹쳐 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다지 심도 깊은 대화가 아니었다. 소소한 농담들이 서로 오고 가며, 웃고,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전에는 나의 집에서 일터까지 한 시간 반 가량의 대중교통 이용 시간이 너무나도 길고 고통스러웠으나,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나는 그 시간을 사람들과 만나는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가게 되었다. 언제 들어도 어색한 버스와 지하철의 안내 방송이 설레기 시작했으며, 띡, 띠고 찍히는 교통 카드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은 이전의 나에게는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힘 혹은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며 나를 압박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내가 다시 만나게 된 사람들까지 가끔씩 의심하며, 마음의 경계를 잘 풀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제야 나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서로를 향한 신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뢰라는 것은 굉장히 불친절한 감정이다. 아니 어쩌면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꽤나 불친절한 것일지 모르겠다. 내가 누군가를 신뢰하기로 했을 때는 신뢰가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변수와 예시, 혹은 경우의 수가 내 머릿속에 찾아와 의심하고 또 조심하게 된다. 물론 합리적인 선택일 수는 있겠으나, 항상 합리적인 것이 좋은 것은 아니리라. 오히려 서로 의심하며 만나게 될수록 시간이 지나며 서로에게 씌워진 선입견의 눈꺼풀이 벗겨지며, 가장 솔직한 각자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서로를 ‘신뢰’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말을 더듬어도, 다리를 절어 함께 걸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직 완벽히 가시지 않은 공황 덕에 주머니 속 약 통을 정신없이 더듬어도, 내 앞에 마주 앉은 이 사람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신뢰. 사람들이 볼 때는 멍청한 마음이라고 욕할 수 있겠으나, 어쩌겠나, 이 신뢰는 진짜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의 진심을 이미 꽤 오랜 시간을 지나며 믿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난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웃게 되고, 함께 울게 된다. 함께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함께 기대하기도 한다. 사람은 믿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으나, 나에게는 이 믿음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일주일에 세네 번 이상은 이 사람들과 만나며 함께한다.
2. 이야기.
나의 병은 나의 역린이며,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아주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아주 어릴 적 싸웠던 친구가 나에게 “정신병자 새끼”라며 쏘아붙인 기억 때문일까. 혹은 나를 걱정하신 나의 부모님이 이 병에 대하여는 절대 함구하라는 그 말을 내가 맹목적으로 믿은 탓일까. 이 병은 들켜 셔는 안 되는 존재였다. 병원을 가야 하는 날에 다른 누구가 나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어보았을 때도, 나는 단순히 몸이 조금 좋지 않아 주기적으로 병원을 가 진료를 받아야 한다며 둘러대는 것을 아주 잘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했다.
밤마다 꺼내 먹는 약을 진통제라고, 공황 발작 때 먹는 안정제를 소화제라고 거짓말하며 먹는 그 기분이 어떤지 아는가.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그대는 아는가. 끔찍하고 처절하다. 보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발버둥이다. 심지어 매 순간 죽음을 깊이 생각할 때 그 처절함까지 동시에 찾아올 때면, 아주 산산이 부서진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한다. 내가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낸다. 불행을 파는 것이 아닌, 내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도와달라고 손짓한다. 홀로 그 오랜 시간을 버텨온 나에게 누군가에게 도와달라 손을 내미는 것은 이전까지만 해도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으나, 죽음을 다짐하고 사흘 후 일어난 나에게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먼저 가면을 벗고, 나의 상처와 흉터와 고통을 먼저 그들에게 보여주니, 그들의 눈에는 한 두 방울 씩 물방울이 맺힌다. 흐른다. 함께 울기 시작한다. 그 후 각자가 조용하지만 강한 목소리로, 그들의 상처를 꺼낸다. 이야기하기 싫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꺼낸다. 경쟁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이 솔직해지는 시간을 가진다.
이야기는 강력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가장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가장 처절한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일 때, 서로는 더욱 단단해지고 다짐한다.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하구나, 서로가 걸었던 어깨를 절대 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그 눈에서는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강한 신뢰의 눈빛이 비친다. 아마 이 이야기를 그때 나눴던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아,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구나.
아, 나는 가면을 벗는 날을 꿈꿔왔구나.
아, 나는 사람이 그리웠구나.
아, 나는 사랑이 그리웠구나.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며,
나는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