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에서 서울로.
나는 빚이 꽤 있다. 이전의 삶에서 수많은 실패와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나는 온몸으로 맞았다. 홍대에서 몇 개월을 살면서 타투이스트 생활을 했을 때는 월세를 낼 돈이 빠듯한 적이 너무나 많았으며, 작업이 많아지려 할 때마다 ‘집단감염’ 등의 사건이 생겨 쉽사리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면 되지 않았냐고? PC방은 아예 영업이 정지되고, 카페, 식당 등도 밤 열 시 이후에는 문을 닫고, 기존에 있던 아르바이트도 해고하는 형편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월세는 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루에 한 끼 라면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대출을 알아보고, 대출을 실행하고, 겨우 그 돈으로 생활을 했다. 감사하게도 대출 이자 낼만큼의 작업은 조금씩 있어서 신용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벌려놓은 대출은 꽤 큰 금액이 되었다.
그러다 다시 분당에 있는 본가로 넘어와 살게 되었으며, 이후부터는 나는 자취라는 것은 결혼 전까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에서는 없는 문제라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 왕복 세 시간을 광역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그래도 월세와 공과금은 지출하지 않아도 되니, 감사하며 살았다.
타투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고, 어느샌가 나의 병이 다 나았다. 이제는 집보다는 밖이 더 편해졌다. 이전에는 집 밖 자체를 불편해했으니, 이것 또한 좋은 변화였던 것 같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나의 가족과의 유대감이 그리 크지 않다. 열여섯 때부터 나의 부모님보다는 낯선 이들과 더 오래 지냈기 때문일까, 나의 부모님과 나는 그렇게 적대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편한 관계는 아니다.
다만 조금씩 내가 더 밖에 머무는 시간이 잦아지고, 주말에도 집보다는 밖에서 더 머물다 보니 나는 왕복 세 시간이라는 거리 자체가 조금씩 더 부담스러워졌다.
매일같이 분당에서 장충동, 장충동에서 홍대, 홍대에서 분당으로 이어지는 이동은 나를 조금씩 더 지치게 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중소기업 청년 전세대출 (줄여서 중기청) 모집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부모님 몰래 자료를 모으고, 부모님을 설득할 만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준비했다.
또 나는 단순히 이동 거리와 시간이 커 독립을 결심하게 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밝히고 싶다.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이 모든 것들을 본가에서 하기에는 꽤 불편하다는 것을 수개월 간 인지하고 있었고, 나만의 공간, 나만의 작업실을 만들고자 했다. 단순히 현재 취업한 곳에서 자족하면서 살기에는 스스로가 납득할 만큼의 모습이 아니었고, 최소한의 예술을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단칸방을 알아보았다.
부모님께서는 아무래도 걱정이 크셨을 것이다. 이미 꽤 큰 액수의 대출이 있는 상태에서 전세대출이라는 큰 금액의 대출이 생기는 것이 걱정이 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뉴스와 신문에 전세 사기에 대한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직후라 부모님께서는 당연히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공부하게 되었다. 등기부등본을 보는 법, 채무 금액을 확인하는 법, 어떠한 방법으로 나의 돈을 지켜야 하는지 수많은 공부를 단 기간에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본가에서 나와 나만의 공간에서 지내고 싶었다. 집의 크기는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저 내가 나의 것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기를 소망했다.
그렇게 삼 주 가량을 공부하고, 부동산에 연락해 집을 알아보고, 대출 상품을 알아보고, 전화하고, 상담하고, 이 모든 과정이 지나, 나는 작년 십 이월 말, 계약을 하게 되었고, 올해 일월 말, 신촌에 있는 자그마한 방 한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 후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그때의 마음은 어쩌면 꽤 신기했다. 이제는 모험은 무슨, 겨우 겨우 살아내는 것에 만족을 했으나, 이제는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나름의 큰 결심을 다시 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매 달 지출하게 되는 전세 이자와 여러 생활비에 대한 압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의 삶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가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혹자는 그저 내가 나의 부모님을 피하여 도망친 것이 아닌지, 여러 상황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지 좋지 않은 말과 시선을 보낼 때도 있다. 물론 나를 오래 봐 왔던 자들이라면 충분히 그 이야기들을 내게 할 수 있다.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는 동의가 가는 부분도 있다.
다만 나에게는 이 이사는, 모험이다. 단순히 “집이 싫다.”는 이유가 아닌,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문제와 이유, 그리고 이제는 이루어 보고 싶고, 그려 보고 싶은 어떠한 삶을 위한 모험이다. 이제 나는 모험을 할 수 있는 나이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 들어갈수록 모험을 시도하기 버거워진다면, 나는 지금의 나이기에 최선을 다하여 모험의 깃발을 올리리라.
그렇게, 그렇게, 깃발을 들고 나아가고 나아간다면,
그렇게, 그렇게, 살아남는다면,
나는,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