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최종장
글을 쓰는 회사원,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다.
아주 오랜만에 회사에 입사를 하고, 맞는 첫 번째 명절이다. 명절이 되면 글을 적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끊임없이 늘어지거나, 그 늘어짐에 맞추어 찾아오는 수많은 생각의 범람 속에 숨을 참고 잠수를 하는 선택지 말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이틀 가량이 지나고, 글을 적기 위해 노트북의 덮개를 아주 조심스럽게 연다.
이 덮개를 열면 나는 나의 감정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할 의무가 생기기에, 글을 쓰기로 한 결심과 덮개를 여는 행위 사이, 나는 이미 큰 노동을 치른 셈이다.
혹은 이제부터 시작될 성찰과 자기 학대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초를 켜고, 인센스에 불을 붙인다. 좋아하는 향이었는데 몇 주 동안의 바쁜 삶이었다 보니 미처 불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는다.
류이치 사카모토라고 했던가, 사실 이 음악가의 많은 앨범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저 어느 날 유튜브에서 재생된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가 나의 마음속에 자리를 내게 했고, 글을 적을 때면 그 플레이리스트를 켜기 일쑤이다.
형광등을 끄고 쿠팡에서 사놓은 2만 원짜리 조명에 전원을 켠다.
주황색 전구가 희미하게 빛을 낸다. 더 이상의 빛보다는 그저 지금 나의 눈앞에 있는 자그마한 빛, 그리고 작은 싸구려 전구가 내는 희미한 빛이 나를 더욱 몰입하게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대학교 교양 강의 수업 때 들었던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은 왜일까, 어느 철학보다 나의 믿음이 크다고 믿었으나, 바쁘고 정신없이 흘러가는 삶 가운데에서, 수많은 고민과 생각들 속에서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싣는 나의 삶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이 철학자의 이야기들이었다.
그래, 삶은 고통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지성이 있는 사람이건, 혹은 백지상태의 사람이건, 삶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고통이다. 생존과 맞서 싸워야 한다.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존심을 버려가며 머리를 숙이며 살아가야 한다.
사랑과 싸워야 한다. 사랑은 오기도 하지만 떠날 때가 더욱 많다. 사랑과 싸워야 한다. 오는 사랑을 품 안에 안아야 하고, 가는 사랑을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보내야 한다.
보내지 못하는 사랑은 폭력이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었기 때문일까, 가는 사랑을 단 한 순간도 마음껏 잡아보지 못한 나의 사랑의 멍청함에, 그저 사회적 시선에만 집중해서 나의 감정에는 신경 쓰지 못한 한 사람의 저열함에 치가 떨리기도 한다.
자신과 싸워야 한다. 사실 가장 중요한 싸움은 이것이 아닐까 한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내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것이 사람일진대, 이 비열한 동물은 언제고 자신이 쉴 곳을 찾아 바쁘게 고개를 옮긴다.
물 한 모금을 마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사람은 잠시 먹을 자리를 찾는다. 먹을 자리를 찾을 때, 이 사람은, 아니 동물은 다리를 뻗고 잠시 눈을 붙일 공간을 찾는다.
저열한 것이 사람이고,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받은 것을 잊고, 사랑할 줄 모르고, 그저 보내는 것이, 혹은 폭력적 이게도 붙잡는 것이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저열한 동물이 바로 사람이다. 아니 부끄럼 많은 생을 지나고 있는 나 자신이다.
이 모든 것이 욕망일까, 나의 욕망과 스스로 삶을 주체적으로 발돋움시키겠다는 자의적 의지가 낳은 것이 시끄럽게도 울어대고 있는 '고통'이라는 핏덩이일까. 한 순간의 욕망은 몇 날 며칠의 후회와 자책을 낳는데, 결국 욕망과 의지가 나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했던 순수하고 무의지적인 관조가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해 주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근원을 인간의 의지라고 했다. 그는 욕망과 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로 ‘무의지적 관조’를 제안했지만, 나는 그 관조 속에서도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이 떠오르는 경험을 했다.
예술적 경험, 예술적 경지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과연 순수한 관조자, 그저 존재를 인식하는 한 객체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의지라는 개념, 욕망이라는 개념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며 자유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 일시적이라는 시간은 반복될 수 있는 가치일까. 혹은 매 순간 이 경험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유일까.
“It is only through the pure, will-less contemplation... that the peace which we were always seeking comes to us.”
(순수하고 무의지적인 관조를 통해서만, 우리가 늘 찾아 헤매던 평화가 온다.)
—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Vol. 1, §34
아니, 그럴 수 없다. 이 가치를 잠시나마 나는 부정하고자 한다.
이 부정이 절대적 가치이자, 새로운 철학적 관념의 제시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나의 삶과 경험 가운데에서 이 가치는 존재할 수 없음을 명백히 깨달았다.
예술적인 욕망의 멈춤은 존재할 수 없다. 욕망은 전차와도 같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보았던 미군의 전차가 중동 사막을 달리는 장면이 기억난다. 굉음을 내며, 이 땅을 울리며, 가로막는 그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무한궤도의 회전 소리,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전진하는 그 모습은 욕망과도 같다.
욕망은 불이다. 품은 객체까지도 모두 불태워 소멸시켜 버리는 아주 지독하고 뜨거운 불이다.
의지는 정지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히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을, '불행'이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 삶을 개척해 나가고, 대물림되는 가난과 저주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워지기를 꿈꾼다. 그것이 자신의 두 손에 달린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심지어 그 의지가 또 다른 사슬과 또 다른 감옥을 만드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의지의 작동을 방관하는 것이 사람이다.
스스로 정지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한, 이 세계 가운데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한, 생각하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한, 이 의지는 스스로 정지될 수 없다.
순수한 인식은 멸종되었다.
어쩌면 긴 역사 가운데 사람이 순수했던 시절은 존재하지 않기라도 했듯이, 순수한 인식은 멸종되었다.
사람에게 '생각'이라는 도구가 주어진 순간 무의지적인 관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경험과 개개인의 사유하는 방식은 어느 물체를 관조하더라도 전부 다른 세계를 비추며 바라보기 마련이다. 이 두 이야기는 결국 인간에게는 '이상'이요, 혹자에게는 '불가능'의 이야기이다.
그 어느 순간도 사람은 고요할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누구일지라도, 단 한순간일지라도 생각의 범람 속, 까딱하면 자신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거대한 폭풍우 같은 생각을 마주한 적 있지 않는가, 인식의 과부하를 그대는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평화를 찾고자 하는 것이 사람이다.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 아무런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말 그대로 기구한 것이 아닌가. 탄생과 죽음의 이유조차 모른 채 스러져만 가는 건이 삶 아닌가. 그러니 이 방법으로 우리 들어가 보자.
마지막 보루일지라도 이 방법 안으로 우리 들어가 보자.
'세계'라는 단어의 집착에서 벗어나 더 큰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인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오감의 단계와 인지와 인식의 단계보다 더 큰 질서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이 질서 안에는 그대가 그토록 꿈꿔왔던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의 답이 존재한다. 그대가 인식하기도 훨씬 전인 이 시간 속에, 그대의 존재와 인식에 대한 비밀이 솟구치고 있다.
질서를 부수는 것이 아닌, 그대를 구속했던 작은 질서들 위에 놓인 더 깊은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법에서 하위 법령이 상위 법령에 위배된다면, 그 하위 법령으로서 구속되었던 모든 자유는 해방되는 것처럼, 그대 인식 속 그대를 옭아매었던 수많은 작은 질서들이, 더 큰 질서 안으로 그대가 뛰어들 때, 큰 질서 안에서 작은 질서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대의 손목과 발목에 묶인 사슬을 풀어낼 것이다.
인지 밖의 커다란 존재는, 세 번의 울림으로 그대를 부르고, 그대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존재론적인 자유를 선사할 것이며, 인지의 확장을 선물할 것이다.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그대에게 나지막이 속삭일 것이다.
이는 곧 해방을 의미한다.
그대는 더 이상 자기중심의 의지적 구속에 메여있지 않은 상태이다. 자기중심적 의지로 삶을 일구어나가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모두가 이야기했지만, 생각해 보라, 그대는 단 한순간도 그대의 의지로만 삶을 살아내었는가?
주어진 삶이기에 자유롭게 살아내야 한다고 많은 혀가 이야기했다. 우리가 자유라 믿었던 그 시간들은, 어쩌면 또 다른 질서의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
돈과, 사랑과, 직장과, 가족과, 친구와, 이 세계와의 관계 안에서 그대는 정녕 자유로웠는가?
질서가 그대를 구속하기에 이 질서의 차꼬를 풀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순수한 자유는 그대가 더 큰 질서에 몸담기로 선언한 다음부터인 것을 그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되려 허울뿐인 문장들이 하나 둘 더 굵은 쇠사슬을 그대의 의식 한가운데 메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 더 큰 질서 속에 스스로를 두라. 한두 가지의 관조를 위하여 더 굵은 사슬을 그대 목에 매달지 말라.
세상은 흐른다. 시간과 같이 이 세상은 어느 한 방향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다. 시작이 있으면 그 끝은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더 큰 질서에 그대가 몸을 누일 때, 그대는 아주 큰 강물이 바다로 흐르는 것처럼 이 흐름 안에 몸을 누일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의지와 욕망은 이제 자리할 수 없다.
그저 몸을 포근히 감싸는 흐름과 질서 속에 몸을 눕히라. 그때 그대는, 나는 안식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다. 인식할 수 있다. 아니, 인지와 인식의 관념을 뛰어넘는 '경험'의 단계로 들어설 것이다.
허울뿐인 말과 문장의 나열이 아니다. 이 경험은, '질서'와 '흐름'은 지금도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따스히 이 흐름 가운데에서, 세계의 변두리가 아닌 세계의 중심에서 이 흐름을 바라볼 수 있다. 수많은 철학자가 이야기했던 초월이라는 단어와 초월이라는 상태는 결국 '나와 너'의 단계에서 머무르지 아니하고 새로운 관념과 새로운 질서, 새로운 흐름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뜨이는 것을 의미하겠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란 단순한 정지나 탈출이 아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존재의 흐름과 질서를 받아들이고, 욕망과 의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잠시 숨을 고르는 경험이다. 그 작은 순간이 쌓여, 비로소 삶은 견딜 만한 풍경으로 바뀌어간다.
암막 커튼이 쳐져 있는 어두운 방 안에서 울고 있는 그대여, 그 커튼을 단 일 센티라도 걷어보라. 상상하지 못했던 빛의 파동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그대의 두 눈에 담기리라.
거대한 질서와 거대한 흐름 한가운데 그대가 안식할 때, 그대가 인지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그대를 반기리라.
이 한 편의 글 안에서 수 없이 반복해서 말하는 질서와 흐름을, 어떤 이는, 그리고 나는 ‘은혜’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세계 가운데 온 그대여, 두 손을 들어 격려와 환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