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경계선 15화

나를 사랑하라

by TheGrace

꿈을 쥐고 달려 나가다 현실의 주먹질에 무릎을 꿇고 두 손 가득한 꿈을 놓아버린 사람을 본 적 있는가?

하루 밤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모든 것을 나누었다가 혼자가 되어버린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아름다운 것들과 쓰라린 칼자국들, 두 손 가득했던 서로의 온기, 모진 말로 주고받았던 파도를 함께 감당하던 사람의 상실이, 한 사람에게 어떠한 폐허를 선물하는지 아는가?


그래서 사람은 삶을 끊기도 하고, 그 삶의 줄로 다른 이의 목을 감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이다 못해 날 때부터 처절히 외로운 한 마리의 짐승인가 보다.

맹수들은, 야생의 짐승들은 그래도 한 무리에서 살고 죽어가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여 살아간다지만,

그 법칙조차 이겨내려 하는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지독히 외로움이라는 굴레 속에 방황한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해진 누군가는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한다. 무엇이 그대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인 줄 모르는 그대는 오늘 밤도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하여 온 동네를 헤맨다. 불친절한 삶이 내지른 주먹질에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는 그대는 그 분노를 풀어내기 위하여 날 선 쇠붙이로 그대의 몸에 무엇인가를 새긴다.

영원한 사랑에 배신당한 그대는 이 세상이 그대를 저버린 것 마냥 높은 다리 위에서 하염없이 물의 찰랑임을 바라본다.


그대의 눈물이 한강을 덮을 정도로 하염없이 사랑의 기억들을 쏟아내며.


그래, 원래 삶은 이런 것이다.


저열하고 비열한 사람들은 그대의 삶의 여정보다 일순간 떨어질 꿀과 열매를 취하기 위해 비릿한 미소를 흘리고, 영원할 줄 알았던 단 하나의 사람에게는 그대가 전부가 아니었다. 위해준다던 말들의 대부분은 거짓말이고, 모두는 처절히 외로운 만큼 처절히 자신의 잇속만을 위하여 발버둥 친다. 고통이 없는 삶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듯,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대는 사랑을 원한다.


모두의 불친절함에 처절히 찢긴 그날 밤, 그대는 길 가에 상처 입은 고양이를 몇 시간이 가도록 돌보아 주었다. 오늘 하루는 그대 편이 아니었지만, 그대는 을지로 3가 역 출구 앞에 있는 노숙인을 위하여 지갑을 털어 그의 며칠 식사를 해결해 주었다. 나의 눈에는 그대의 눈물이 먼저 보였건만, 그대는 하얀 손수건을 꺼내고, 손을 내밀어 마주 앉은 비참한 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세상은, 사람은, 삶은 불친절한데, 그대는 친절을 보이고 있다.


한 겨울, 온몸의 세포가 다 얼어버릴 것 같은 새벽, 약속이라도 한 듯 언덕길을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하던 그날. 이미 그대의 집도 지났고, 나의 집도 지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걸었다. 그대의 친절은 충분히 얼어있던 나도, 한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던 그 골목길도 녹이는 듯했다. 새벽 두 시를 보여주는 시계이지만 왠지 그날은 눈이 부시어 그대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만일 이 세계의 끝이 존재한다면, 그 세계의 끝에 누군가는 다다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대이리라.

친절하고 다정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친절함과 다정함을 보여준 그대이기에 아마 그대는 세계의 끝에도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그곳에서도 그대는 아주 밝게 빛나고 있으리라.


그래서,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리 거친 이 땅이라 할지라도, 그대가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 혹시, 아주 혹시, 필요하다면 내가 우산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이미 그대에게 받은 것이 너무나 많다. 삶을 대하는 방식과 사람을 대하는 방법, 계산적이고 수를 따져가며 대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를 사랑하기에 보이는 아름다움과 친절함. 완벽히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많이 배웠다. 그러니 우산이 되었으면 한다.


모진 말들, 거친 도로와 살을 찢는 듯한 비바람도 나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대는 다르다.

그대는 다치지 않아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삶의 빛이 사그라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내어주는 나를 사용하라. 그 앞에 있는 나라는 한 존재를 마음껏 사용하라.

주저하는 눈빛 대신 고맙다는 미소와 고개 끄덕임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러니 사용하라.


아마 그것이 목적이요, 아마 그것이 이유겠지. 지쳐 스러지지 않고 그대 앞에 내가 있는 그 목적과 이유 말이다. 그러니 그대, 그러니 그대. 너무나 아름다운 그대, 빛을 발하는 그대여, 따스함으로 발걸음 내딛는 곳마다 뒤덮고 있는 그대여.


나를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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