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식당에서 합리적 소비자 되기
제가 미국에 살면서 불만을 느끼는 문화가 하나 있습니다. 식당 가격표 문화입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면 기분이 찜찜합니다. 꼭 사기를 당한 것만 같습니다. 왜냐고요? 미국에선 식당 메뉴판에 적힌 가격과 밥을 먹고 실제 지불하는 가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스파게티집에 갔다고 합시다. 메뉴를 봤더니 까르보나라 옆에 $10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까르보나라를 먹고 내는 돈은 $10달러가 아닙니다. 계산대에서 지불하는 돈은 세금 9.25%(제가 사는 동네 기준)에 팁 20%를 더해 $13.1가 됩니다. 메뉴판에 적힌 금액보다 31%가 증가합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메뉴판 가격에 세금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애초에 메뉴판을 볼 때 세금과 팁을 고려하면 되지 않냐고 의아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마치 고장난 시계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시계가 고장 나서 원래 시간보다 10분 늦게 가는 거죠. 물론 머릿속으로 10분을 더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잘못된 시간을 믿게 됩니다.
이게 제 문제만은 아닙니다. 미국인조차 저랑 똑같은 행동 패턴을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 연구는 세금을 소비자가 볼 수 있도록 가격에 미리 포함해 놓느냐 안 해 놓느냐에 따라 소비자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연구자들이 3개 슈퍼마켓을 정해, 한 슈퍼마켓 진열대 물건에 세금(7.375%)을 포함한 가격표를 걸어두고 나머지 두 슈퍼마켓에선 세금을 뺀 가격표를 걸어두었습니다. (세금을 뺀 가격표를 걸어놓은 슈퍼마켓에선 계산대에서 물건을 계산할 때 세금이 부과됩니다.) 매를 미리 맞을래, 나중에 맞을래와 같은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실험 결과 세금을 포함한 가격표를 사용한 슈퍼마켓 매출이 다른 두 곳 보다 8%나 줄었습니다. 보이는 가격이 더 비싸니까 사람들이 덜 소비했다는 말입니다. 최종적으로 지불하는 돈은 같은 데도 말이죠. 소비자들이 세금에 대해 무지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연구자들이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평균적으로 8개 중 7개 품목에 대해 세금 부과 여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실험 결과가 신빙성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데이터도 들여다 봤습니다. 바로 술에 붙는 세금인데요. 미국은 주류에 두 가지 세금이 부과됩니다. 하나는 특별소비세(excise tax)고, 다른 하나는 판매세(sales tax)입니다. 특별소비세는 주류나 담배 같은 상품에 붙어서 정부가 일정 품목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쓰입니다. 특별소비세는 술 가격에 미리 포함되지만, 판매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맥주를 사려고 편의점에 갔습니다. 코로나 한 병에 $5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5는 특별소비세가 미리 포함된 가격입니다. 그리고 이 코로나를 계산대로 가져가 계산하면 최종적으로 지불하는 돈은 $5+판매세(8% 가정)=$5.4가 됩니다.
맥주도 첫 번째 실험처럼 가격에 미리 포함된 세금(특별소비세)과 나중에 계산되는 세금(판매세)이 존재합하는거죠. 연구자들은 1970년부터 2003년 동안 특별소비세와 판매세 변화 중 어떤 게 사람들의 주류 소비량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비슷한 증가량이라도 판매세(나중에 계산됨)가 증가할 때보다 특별소비세(가격에 미리 포함)가 증가할 때 주류 소비량이 더 큰 폭으로 감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금이 가격에 미리 포함됐을 때 소비자들은 세금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말입니다.
전통적인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정부가 물품에 세금을 매기면 판매자와 소비자가 세금 부담을 나눠 갖게 됩니다. 소비자 입장에선 사려고 하는 물품에 세금이 붙으면 가격이 더 비싸지기 때문에 원래 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그 상품을 사야 합니다. 또 판매자 입장에선 세금으로 인해 상품 가격이 올라가면 판매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세금 부담을 지게 되죠.
하지만 어떤 물품에 세금이 부과돼서 더 비싼 가격에 팔려도 소비자 수요가 줄지 않는다면 소비자가 모든 세금 부담을 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웃는 건 판매자와 정부 쪽이죠. 그야말로 소비자만 호구 되는 겁니다.
한국은 마트에서 쇼핑을 하거나 식당 메뉴판을 볼 때 가격에 세금이 대부분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속을 일이 거의 없죠. 하지만 미국은 다릅니다. 대부분 마트는 세금을 뺀 가격표를 걸어두고, 거의 모든 식당 메뉴판도 세금을 뺀 가격을 적어 놓습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호갱이 되지 않으려면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보이는 가격보다 10% 정도 더 비싸다는 사실(식당은 팁 포함 30%)을 항상 인지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