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의 가을'이라는 문구는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저 말의 느낌이 좋아서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부터 채널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엘렌'을 글을 쓰는 '나'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처음에 그런 생각은 없었다. '엘렌의 가을'이라는 문구 전체를 '채널명'으로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실 영어로 이름을 붙이기는 어딘지 모르게 낯간지러운 일이어서, 나는 외국에서 살 때에도 한국어 이름을 썼다. 다행히 내 이름은 그들에게 낯설 뿐, 철자가 복잡하지는 않았다.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면 '엘렌'이라는 이름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국의 카페에서 낯선 이름을 말하기보다는 익명성 속에 머물고 싶을 때, 또는 편의상의 목적으로 영어 이름을 요청할 때, 나는 많은 생각 없이 '엘렌'이라는 이름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단어, '엘렌'과 '가을'이 내게 호감을 주는 것도 분명하다. '엘렌'은 할머니의 세례명과 같은 기원을 가지며 '가을'은 글쓰기에 있어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가을'의 상태에 진입하려고 한다. 가을은 내게 명료한 계절이다. 바람이 깨끗하고 여름 내내 뻗어 오르던 에너지들이 조금씩 정돈되면서 열매를 맺어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도시 어디서건 가벼운 셔츠를 입고 산책할 수 있다. 나는 가을의 서늘하면서도 싱싱한 기분을 좋아한다. 가을은 새벽의 공기처럼, 어딘가 사람의 마음의 공간 한쪽 편을 비워준다. 누군가는 그것을 쓸쓸함으로 느끼지만 내게는 그 기분이 몰래 찾아온 산들바람처럼 설렘을 일으킨다. 그것은 그렇게 애쓰지도 않은, 그렇다고 아무런 동력도 가해지지 않지는 않은, 톡, 하고 바삭거리는 설렘이다. 흔히 보사노바를 여름의 음악이라고 하지만 나는 가을에 바로 그 적당한 온도의, 그 정도면 썩 괜찮은 행복감을 느낀다.
'사실 나는 내가 지나며 만난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이 말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이 말을 할 수 있었을 때, 이 문장을 쓸 수 있었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이 문장이 엄청나다고 느낀다. '모든 것들을'?
이것은 삶을 충실히 살아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모조리, 남김없이. 삶의 모든 순간과 화해한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빛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이의 고백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