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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가비 Oct 29. 2024

[100-51] 엄마 음식이 생각날 때

 나는 편식하지만 입맛이 없는 때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음식은 많이, 빨리 먹기도 한다. 살이 찌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맛있게 먹는 먹방을 찍으며 실컷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 햇과일, 햇곡식이 풍성해지는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천고마비'의 계절로 불리는데 요즘에는 식욕이 왕성해지는 사람들이 "하늘은 높고 나는 살찐다"는 현실을 담아 '천고나비'라고 바꾸어 말하는 것을 보고 공감했다. 나의 식욕도 왕성해졌으므로.


  사십대 중반, 주부 20년차. 어지간한 요리는 해먹으면 되긴 하는데 점점 귀찮아져서 사먹거나 간단하게 해결하려는 꼼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한번씩 엄마의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요즘이 그렇다. 친정에 가서 엄마에게 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냐고?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자주 못간다는 핑계를 대본다. 그래서 문득 생각나는 음식들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엄마의 요리중 내가 쏘울 푸드로 꼽는 몇 가지가 있는데 닭개장, 고등어조림, 가지조림, 늙은 호박전이 그것이다. 먹으면 힘이 나고 마음도 뜨끈해지는 쏘울 푸드.


 닭개장은 재료가 너무 다양하고 손이 많이 가서 거의 해먹지 않는다. 파는 곳도 흔하지 않아서 육개장을 먹는 것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엄마가 해주는 고등어조림은 시래기와 무, 양파를 잔뜩 넣고 푹 졸인 깊은 감칠맛이 났는데 내가 해먹으면 그 맛이 안나서 몇 번 해먹다가 포기했다.


 가지조림은 가지를 푹 쪄서 길게 손으로 찢은 후 양념과 버무려내면 밥 두 그릇은 뚝딱하는 맛인데, 우리집에서 가지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이라서 굳이 그렇게 손이 가는 수고스러운 방식으로 해먹지는 않는다. 가끔 치즈 듬뿍 넣은 가지그라탕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별미에 속하는 늙은 호박전! 가을이 되니 노란 호박이 여기저기서 많이 보인다. 지금 시골에서 지내다보니 길가에 흔하디 흔하게 널려있는 누런 호박을 볼때마다 엄마가 해주던 달큰한 맛의 호박전이  생각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큰 호박을 갈라서 씨를 다 빼내고 속을 긁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박박 긁어낸 속을 모아 살짝 간을 하고 부침가루(그때는 밀가루였을까?)를 섞어서 부치면 호박의 들큰하고 물컹한 맛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특히 가장자리가 살짝 바싹하게 구워지면 더 맛있다. 끄트머리부터 떼어먹으면서 먹다보면 끝도 없이 넘어가던 늙은호박전이 간절해졌다.


 호박전은 사먹기도 힘들어서 직접 해먹는 수밖에 없다. 일단 밭에서 따놓았던 큰 호박 한 통을 째려보며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고민했다. 껍질을 깨끗이 씻어 반 가르고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늙은 호박은 부드러울 거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껍질이 어찌나 단단한지 칼로 쪼개면서 손 다칠까봐 조마조마했고, 조각낸 후 껍질을 벗기면서도 손 힘을 잘못 썼다가 베일 것 같아섳몹시 신중하게 칼질을 했다. 용을 썼더니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주방에 채칼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일일이 채를 썰어야 한다는 얘긴데 이미 씨까지 발라내고 조각낸 호박인데 어쩌랴. 할 수 있는만큼 해보자 싶어서 채썰기를 했다. 처음에 야심찼던 의지는 어느새 딱딱한 호박을 손질하면서 손이 아프고 힘들어지자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고르게 썬다고 썰었지만 삐뚤빼뚤한 모양에 두껍게 잘렸다. 과연 잘 익긴 할까 싶은 걱정이 들었지만 설탕과 소금 넣고 좀 절여둔 후 부침가루 살짝 섞어 부쳐내니 엄마가 해주던 맛과 비슷한 맛이 났다. 아~행복하여라. 일일이 손질하고 만든 수고로움이 들어가니 더 맛있다.

 

 두 장을 부쳐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부드럽고 큰한 맛에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갔다. 그런데 너무 두껍게 썰어진 것이 계속 거슬렸고 모양도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박의 8분의 1쯤 사용했으니 아직 큼지막한 조각의 호박은 많이 남아 있다.


 결국 나는 채칼을 샀고 잘고 고르게 썰린 호박채를 보고서야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내일 해먹으려고 냉장고에 잘 넣어두었다. 식감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꼭 가장자리를 바싹하게 구워내는 식감으로 해 먹어야지. 아침 운동가서 열심히 땀내면서 칼로리 소모하고 와서 잔뜩 먹어야겠다. 생각만해도 벌써 신난다. 먹으려고 운동하는 사람 나야 나.


 생각난김에 내일은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겠다. 엄마 힘들까봐 반찬해서 보내달라 그런 말을 잘 안하는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무뚝뚝한 경상도 K장녀다. 내 나름의 효도는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을 지향하지만 오히려 내가 뭔가 부탁하고 해달라고 하는 걸 엄마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올해 칠순이 된 울엄마. 자주 만나러 가지도 않는 무심한 딸인데 식욕 넘치는 가을이 되니 엄마 반찬이 먹고 싶다고 응석을 부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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