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꼰대의 탄생
사회생활을 9-10년 차 정도 되니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나도 모르게 앉아 있다. 나도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응애'하고 울 나이인데, '이제부터 너 책임자, 반박 안 받음' 이러면서 사회가, 회사가 나를 그 자리에 앉혀놨다. 그러면서 '너 밑에 도와줄 사람 한 명은 덤-⭐'이라며 부사수도 한 명 뽑아 주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방송작가 막내 작가일 때도,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갔을 때도 어디 하나 편한 곳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었던 나의 과거를 생각하며, 나는 부사수를 정말 아껴야지. 모르는 건 뭐든지 다 알려줘야지. 다짐했다.
근데 또 나만 진심이었지.
과묵한 남성의 29살 신입이 들어왔다. 그래, 첫날은 다들 어색하지. 나도 그랬으니까. 점차 나아지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 작가 경력도 없고, 회사 생활 경력이라곤 인턴 경험이 끝인 그를 뽑자고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듯 그렇게 하나하나 알려줘서 나랑 오래 일하게 만들자!
그래 이것도 역시 또 나만 진심이었다.
흰 도화지일 줄 알았는데, 검정 도화지가 들어왔다. 칠해도 칠해도,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중구난방으로 튀어 나갔다. 매일 옆에서 챗gpt만 부여잡고 있는 그를 볼 때면 내 속이 타들어갔다. 물론 요즘 챗gpt가 내 회사생활을 구한다지만 작가의 세상은 아직 챗gpt가 구하지 못한다는 걸 그는 몰랐나 보다. 나에게 물어보지...
나는 물음표 살인마로 불릴 만큼 질문이 많은 사람인데, 그래서 부사수가 처음부터 답답했다. 솔직하게 진짜 정말 답답했다. 왜 질문을 안 하지?! 챗gpt가 사수가 아니라고! 옆자리에서 정말 어떤 날은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다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그를 데리고 1층 카페로 갔다.
"어때요? 일 할만해요?"
"예 뭐."
예... 뭐? 대답이 좀 짧다. 아냐 좀 더 대화를 나눠보자.
"아, 뭐 힘든 건 없어요?"
"앉아 있는 게 좀 힘들더라고요."
앉아 있는 게 힘들다고요...? 정규직 회사에, 작가로 왔는데 앉아 있는 게 힘들다고요? 진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그제야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꼰대가 되었다는 걸. 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그의 태도도, 내가 말하는 피드백에 대해 단 하나도 적지 않는 그의 태도도, 내가 한 말에 한 마디도 굽히지 않고 반박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꼰대가 맞고, 맞았고, 맞을 것이다.
카페에서 대화를 하는 동안 녹음을 했는데, 그 녹음을 공개할 수 없음에 답답하다. 직장인들이 자주 하는 sns에 떡하니 '콘텐츠 작가'라고 적어놓은 그의 태도마저 안 좋게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졸고 있는 그를 볼 때면 진짜 속이 뒤집어졌다. 하루는 부사수가 쓴 블로그에 대해 피드백을 주기 위해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이거 왜 이렇게 썼어요? 이거 오타잖아요."
"아, 이거 틀리게 검색하는 사람도 있을까 봐 이런 건데"
"이건 우리 고객사 상품명이기 때문에 바꾸면 안 돼요. 적기 전에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아... 네 그러게요."
"그리고, 이건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맨날 챗gpt에 뭘 물어보는 거예요?"
"아, 블로그 글 쓴 거 피드백해달라고요."
"아, 그럼 걔가 뭐라고 해줘요?"
"뭐 가독성 떨어지니까 이렇게 바꾸면 좋다, 이런 거 얘기해 줘요."
속이 뒤집어진다. 뒤집어져. 그동안 피드백을 챗gpt한테 받고 있었다니. 그래놓고 직장인들의 sns에는 아직 사람이 직접 글을 써야 한다니 뭐라니 적어 놓은 것인가. 정작 일은 챗gpt만으로 하고 있으면서!!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근데, 그런 부분은 우리가 서로 대화하고 해결해 나가는 게 더 나은 거 같아요."
"어? 왜요? 챗gpt한테 물어보면 제가 못 보는 부분까지 빠르게 알려주는데, 그게 더 효율적인 거 아닌가요?"
"근데 그거는 우리가 고민을 안 하고 물어봤을 때 얻은 거잖아요. 우리가 우리 거를 보고 '이거 이렇게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해보고 나서 그다음에 바꾸고 걔한테 물어봤을 때 '이건 우리가 못 본 부분이네!'라고 이해를 하는 것과 그냥 내가 써놓고 gpt한테 보내서 gpt가 찾는 건 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 정 안 되겠으면, gpt한테 물어봤는데 이렇다고 하네요.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정도는 물어봐 주세요"
"아, 그게 맞는 거 같아요."
난 여기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난 도저히 이런 인간과 같이 일할 수 없고, 피드백도 받을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해야 피드백이지. 이건 그냥 벽과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뒤로 그는 정말 꾸준히 챗gpt를 사용했고, 피드백을 받은 후에 "작가님, 챗gpt에서 이렇다고 해서 이렇게 바꿨는데 어떠세요?"라고 정말 물어봤다. 그럼 나는 "네 좋네요."라는 짧은 대답으로 응했다.
사실 에피소드는 더 많다. 그 부사수도 본인만의 글은 잘 쓰는 사람이기에, 이 글을 보게 될까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역시 나의 31살에 있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이기에 그냥 적기로 했다. 물론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입장도 들어봐야지!!"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다. 그럼요. 당연하죠. 저 역시 사람이라, 제가 겪은 일, 그 일을 겪고 있을 때 느꼈던 감정, 생각을 적은 거라 그는 오히려 저를 X 년으로 기억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 사람 진짜 쓰레기 아냐? 를 전하고 싶은 게 아니라 채용의 중요성을 정말 느끼게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헤드헌터 할 땐 사실 고객사 보단 후보자가 1% 더 중요했는데요. 막상 회사에 들어와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 입장이 되니, 서류는 신중히 검토해야 하며, 면접은 더 명확한 질문으로 상대방의 성향을 파악해야 하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세상에 흰 도화지 같은 사람은 없고, 각자만의 색을 가지고 있는데 그 색이 얼마나 나와, 그리고 회사와 잘 융화될지를 봐야 하는 게 채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내가 헤드헌터를 해봤기에 더 뼈저리게 아픈 경험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또 느낀다. 그때 당시 나만 진심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