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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하 Jan 25. 2021

비빌 언덕이 없다

연탄 때는 집에서 살던 시절, 천장에 쥐가 살았다. 낮에는 무시했지만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쥐들이 뛰어다녔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항상 기다란 막대기가 방 한쪽에 놓여있었다. 쥐들이 시끄러울 때면 천장을 두드리는 용도였다. 세숫대야가 간신히 들어가는 욕실에서 쭈그리고 앉아 세수도 하고 샤워도 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세수를 하려고 들어 올린 비누 위엔 쥐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화장실 형편은 더 좋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 20걸음쯤 걸으면 아래가 뻥 뚫린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그마저도 옆집과 함께 써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빌라로 이사하면서 드디어 물이 내려가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항상 듣던 '돈이 없다'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가정 수업에서 재료값이 많이 드는 스탠드는 만들지 못하고 대신 바느질을 했다. 집에 스탠드를 만들고 싶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어차피 돈이 없다는 말을 들을 게 뻔했으니까. 고등학교 졸업 앨범도 같은 이유로 구입하지 않았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어서 백만 원이면 멋지게 제작해주는 업체에 목업을 맡기지 못했다. 다른 학생들은 2학기 동안 디자인만 끝낸 후 업체에 넘겼지만,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2학기가 시작하기 전 방학 기간 내내 직접 손으로 목업을 만들었다. 졸업 앨범도 사지 않았고, 졸업 여행도 가지 않았다. 워킹 홀리데이도 기본 정착비가 없어서 가지 못했다.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한 것이 잔뜩이면서도 나는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엄마는 나를 가지고도 산부인과에 단 한 번 방문했다고 한다. 출산은 조산원에서 했단다. 가난은 내 자리는 여기라고, 감히 높은 곳을 욕망할 수 없게 만든다. 언감생심.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다가는 다친다. 졸업 여행? 귀찮아. 어차피 과에는 친한 사람도 없는데 뭘. 졸업 앨범 사면 뭐해. 일생에 두 번이나 들여다보려나? 유럽 여행 힘들지 않아? 비행기 너무 오래 타야 하고, 소매치기도 많고... 가질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난 그것을 싫어한다고, 이것 또한 내 선택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가난을 제대로 직면하게 된 건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다. 학생 때야 빈부격차가 있어도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급식을 먹었지만 사회에서는 달랐다. 입는 옷에서부터 자주 쓰는 제품, 즐기는 문화생활, 주로 먹는 음식, 사용하는 브랜드. 즉 사람들의 취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야 돈이 없으니 취향도 없었다. 뭐든지 제일 저렴한 것을 사는 게 당연하니까. 거기에 더해 많은 사람이 학생 시절 배낭여행이나 교환 학생 등으로 해외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난 20대 후반까지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학생 때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다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이나 미디어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다름'을 느꼈다. 젊은 시절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 20대에 창업을 해 본 사람들, 일을 관두고 새로운 꿈을 찾은 사람들. 대부분 그들을 뒷받침해주는 배경이 있었다.


가끔 상상한다. 실패해도 나를 받아줄 부모의 재력이 있었다면 나는 더 용감해질 수 있었을까? 내 잠재력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의미 없는 상상보다는 수입이 사라졌을 때의 대책을 더 자주 고민한다.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될까? 갑자기 큰 병에 걸린다면 모아놓았던 돈도 다 쓰게 될 테고,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그러다 병이 낫지 않는다면? 평생 후유증이 남는 다면? 비빌 언덕이 없는 나는 결국 죽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느낀다. 절망이나 슬픔이 아니다. 합리적인 결론이다.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다.


가난을 깨닫게 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분노도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절망도 아니었다. 외로움이 가장 컸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글을 읽다가도 어느 순간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울과 외로움은 조건 없이 온다는 걸 알면서도 나보다 훨씬 안전하고 큰 집에 살면서 주위에 가족도 친구도 많은 그 사람의 우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때 조금은 당황스러워진다. 저 사람이 우울하다면 나는 몇 배나 더 우울해야 하는 거 아닐까? 사실 나는 우울한데 괜찮은 척하는 건가?


그런다고 마냥 슬퍼하면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어찌 됐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분명 세상에는 나와 비슷하거나 훨씬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잔뜩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여유로운 사람은 매력적이고 다들 그들을 닮고 싶어 하니까. 누구도 이런 얘기를 읽고 싶지 않을 거다. 그래도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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