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친청엄마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빛이 바래고 귀퉁이들이 조금씩 달아 없어져 버린 아주 오래된 손바닥 반 만한 사진이었다. 종이 인화지 한 장에 40여 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시간의 흔적이 참 애달파 보인다. 표면에 실금이 여러 개 있다. 주름살 마냥.
건네받은 후 자세히 들여다보니 5~6살쯤 된 여자 아이와 남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데 둘 다 발가벗었다. 두 아이의 표정으로 보아 지들 나를 재밌게 놀던 아이들을 붙잡아 세워 놓고 찍었음이 분명했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도록 인상을 쓰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 귀여웠다. 손도 억지로 잡은 듯 보였다. 여자 아이는 바로 나였다.
"얘는 나고 옆에 있는 앤 누구야?"하고 엄마한테 물었다.
"그 애가 민호야"
"민호? 민호?... 누군 지 모르겠는데 "
'한동네에 살던 민호야"
"민호? 근데 왜 발가벗겨 놓고 사진을 찍었어?" 하고 묻자 엄마는 옛날 생각이 나는지 배시시 웃었다.
"더운 여름에 놀다가 땀을 많이 흘려서 씻기려고 벗겼는데 세워 놓고 보니 어찌나 귀엽던지 민호 엄마가 귀엽다고 찍었어."라고 했다.
"민호라는 애는 어떻게 됐어? 지금은 어디 살아?" 하고 물었다.
"사진 찍은 뒤 얼마 후에 공부하는 아버지 따라서 미국 간다고 식구들 다 갔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있다던데... 네 오빠한테 물어봐라. 민호 형이 네 오빠와 친구야"
그런데 오빠는 내게 민호에 대해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허긴 평소 대면대면 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연락도 잘 안 하는데 이런저런 얘길 나한테 살 살갑게 할 리가 없다.
나는 그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민호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는 그 사진을 나보고 보관하라고 주었다.
"네 사진이니까 네가 가져 가"
딱히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귀한 어릴 적 사진이어서 받아왔다.
집에 와서 사진을 사진첩에 보관하려다 다시 한번 더 들여 다 보았다. 오동통 동굴 동굴 귀엽다. 미간이 찌푸려지도록 인상을 쓰면서 꼭 다문 입술이 영락없이 고집 센 개구쟁이다. 하지만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민호도 민호와 이런 사진을 찍었다는 기억도. 다만 조금 궁금해졌다. 이런 사진을 찍을 정도로 엄마들 사이가 이무로 왔나 본데 민호는 어떻게 자라고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물론 결혼해서 자녀가 하나 둘... 알콩달콩 티격태격 잘 살고 있겠지.
40대 중반인데...
사진을 사진첩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더 이상 손상이 가지 않게...
하지만 40년의 세월이 흐를 동안 사진 속에서만 존재했던 민호라는 사람을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