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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화 Oct 14. 2024

천연염색, 색에 빠지다




강화도는 귀촌하기엔 좋으나 귀농을 하기엔 알맞은 곳이 아니다. 시골치곤 부동산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농지가 있다면 모를까 귀촌한 이주민은 낮게는 평당 50만 원에서 높게는 300만 이상 부르는 그 비싼 땅에서 농사를 지을 이유가 없다.

수도권과 가까우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간직하여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서 전원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시류를 타고 대북 사업을 위한 공단 조성과 도로 건설 계획이 추진되면서 자고 일어나면 땅 값이 오르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부농이 많았고 멋진 전원주택에서 유튜브에 나올 법한 그림 같은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한민국에서 텃세 세기로 유명한 강화도로 삶터를 옮기고서 얻은 여러 가지 중 제일 아이러니한 것은 친구를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어울려 다니느라 바빴다는 것은 아주 큰 변화였다.





어느 날 군청에서 동네 어귀마다 대문짝 만하게 플랑카드를 걸었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방직 공장에서 천연염색을 무료로 가르쳐 주고 게다가 점심까지 주는 3개월 과정의 천연염색 체험 과정을 오픈한다는 것이다.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이웃인 소현이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

그렇게 심심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던 길인데 그때부터 섬을 떠날 때까지 한 시도 천연염색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3개월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수료식도 거하게 하면서 회원들 중에 천연염색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은 더 배우기를 원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더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강화도에는 제대로 공부한 전문가가 없어서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다가 밀양에 천연염색 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걌다. 그곳은 박원장이라는 분이 밀양의 한 폐교를 개조해서 천연염색 학교를 세우고 전국에서 찾아온 3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나도 거기에 합류해 수업료를 내고 1년 정도 강화도와 밀양을 한 달에 한두 번씩 오가며 수업을 들었다. KTX를 타고 밀양역에 내려서 다시 천연염색학교까지 택시를 타고 1시간을 더 들어갔다. 교통비만 한 달에 30만 원가량이 들었지만 천연염색에 빠지다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밀양에서 배운 것을 집에 와서 재현하는 작업을 반복하고 또 박사 논문이나 일본의 원서를 구해서 새벽까지 연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천연염색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역사적으로 그 기록이 거의 없어서 공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미 발간된 책들은 내용이 부실하고 빈약했다. 그만큼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천연염색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옛날에도 염색 재료나 염색한 천을 중국이나 인도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왕족이나 귀족 외엔 일반 백성들은 염색한 옷을 입을 형편도 염색할 시간 여유도 없었다. 나라에서도 일반 백성은 염색한 옷을 못 입게 하다 보니(그래서 백의민족이 상징처럼 되었다) 자연히 천연염색이 발전할 수 없었다.

고문헌 '임원경제지' '규합총서' '산가요록' 등에 부분 적으로 기록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천연염색만을 연구 기록한 책은 없는 걸로 안다.

전 세계적으로 천연염색하면 쪽 염색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나라는 쪽 염색을 하지 않았다. 쪽 염색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조상들이 파란색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일까. 평민들 중에도 극소수 만이 쪽 염색을 했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없다. 나주에서만 겨우겨우 가느다란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마저도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방해로 맥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기록보다 더 안타까운 문제는 염색재료(염재)이다. 빨강이나 보라색을 내는 염제는 아예 없어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데 많은 원단을 물들이려면 비용이 아주 많이 든다.. 수제(손작업)인 데다 비싼 재료비 때문에 제품이 비쌀 수밖에 없고 자연히 대중화되기 어려웠다.

옛날 백성들은 먹고살기도 빠듯했으니 염색 재료인 식물을 좁은 땅에서 재배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도 그렇고.

또한 재배를 한다 해도 기후가 맞지 않아  염색 재료가 될 만한 식물이 자라기 어렵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선 빨간색을 내는 홍화, 자색을 내는 자초, 노란색을 내는 황칠나무나 검은색을 내는 오배자나무 정도가 있지만 이 마저도 매우 귀했다.(세종대왕 때 비싼 홍화와 자초로 지은 옷을 입지 말라는 금령까지 내렸을 정도다.)




현재는 자칭 타칭 천연염색 1세대라 칭하는 몇몇 대학교수들이 잠시 붐을 일으키는 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대중화시키지는 못했다. 위의 요인들 때문에 대중화시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30여 년 전에 천연염색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쪽 염색을 일본으로부터 배워 오고 쪽씨를 역수입해왔지만 2세대 장인들이 이런 기회를 독점적으로 선점하면서 쪽 염료를 뽑는 방법을 너무 어렵게 레시피화 시켜 일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예전 중국 인도 동남아의 일반 가정에선 마당에 쪽통을 만들어 놓고 수시로 쪽염색을 할 정도로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대중화보다는 예술 분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게 맞는 방향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제자를 양성하고 있는지 자세히 모르겠으나 일부 장인들이 자기들만의 예술로 가져 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강화도를 떠나 정선으로 가기로 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천연염색에 대한 이유도 있었다. 천연염색 공방을 꾸리려면 넓은 공간과 수십 마가 넘는 천을 널 수 있는 널찍한 마당이 필요했다. 

정선 집을 보고 나서 사기로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넓은 마당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선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정선 집은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을마다 높은 곳에 대형 물통을 설치해 놓고 지하수를 뽑아 올린 후 그 물을 내려 먹었다.

그런데 정선의 지하수는 석회가 섞인 물이다. 석회와 더불어 알 수 없는 각종 성분이 들어간 물이다. 정선은 아직도 지하수 때문에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지만 구불구불하고 집이 뚝뚝 떨어져 있는 마을에 상수도를 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말은 이해가 되면서도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천대교처럼 바다에도 멋진 다리를 놓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강원도 깊은 산골 마을은 아직도 석회 석탄 그리고 각종 성분이 섞인 지하수를 마신다.

천연염색을 할 때는 안정된 중성수를 사용해야 색을 곱게 뽑을 수 있다. 그래서 수돗물이 가장 적합하다. 또 염색을 하려면 매염제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 매염제 때문에 한때는 논란이 많았다. 매염제가 암을 유발하는 강한 독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화학제품인 매염제를 사용하면서 천연염색이라는 명칭을 사용해도 되는가라는 문제로 많이 고민하고 논쟁이 많았다. 내 입장도 그런 매염제를 사용해선 안되고 더 나아가 화학약품이 들어가므로 천연이란 단어도 사용하면 안 된다였다. 그러나 염재에 따라 화학 매염제 없인 염색이 잘 안 되기 때문에 나와 같은 의견은 화학과 출신 교수들에 의해 무시되거나 철저히 외면받았다. 결국엔 나도 매염제 양을 줄이는 방법으로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정선으로 이사 후, 매염제에 대한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첫 염색을 하던 날. 마당도 넓고 물도 맘껏 사용할 수 있어서 어느 때보다 기대가 크고 설레기까지 했다, 그러나 작업을 하면서 너무 놀라고 말았다.

석회수가 염색을 방해했다.(치하수가 석회수라는 사실을 조금 후에 알게 되었다.) 기대와 전혀 다른 색이 나오거나 천에 물이 잘 들지 않았다. 이미 염색된 것도 색을 뽑아 내 버렸다. 웬만해선 변색이 잘 안 되는 감염색도 석회수에 들어가니 맥없이 탈색 돼버렸다. 너무 놀랍고 허탈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알루미늄 매염제를 사용한 그 많은 물을 어디다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시골 마당... 지하수를 뽑아 올려 먹는 시골에서 땅에 알루미늄(백반: 발암물질)이 들어간 물을 버릴 수가 없었다. 텃밭과 꽃밭은 당연히 오염될 것이다. 마당엔 노란 민들레가 지천으로 자라고(민들레의 노란 꽃이 너무 이뻐서 일부로 번식시켰다.) 그 잎을 바로 채취해서 샐러드나 장아찌를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염색하고 난 물도 버릴 수 없어서 전전긍긍했다. (결국은 집 멀리에 갔다 버렸다. 딱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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